강물과 와인 사이를 천천히 걷던 하루, 보르도

 

며칠 후 우리는 다시 툴루즈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까르카손에서 돌아온 뒤 우리는 이틀 동안 다시 툴루즈의 골목들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낮에는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고, 저녁이면 붉게 물드는 골목 사이를 이유 없이 헤매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나는 아침. 아직 잠이 덜 깬 도시를 뒤로한 채 이번에는 보르도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툴루즈에서 보르도까지는 약 세 시간 남짓.

 

창밖 풍경은 천천히 흘러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남프랑스 들판과 작은 마을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길가 곳곳에 포도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버스는 조용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이어폰을 끼거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멍하니 창가에 기대 앉아 지나가는 풍경만 바라봤다.

 

이상하게 여행 중 이동 시간은 참 묘하다. 어딘가로 향하고 있지만, 동시에 방금까지 머물던 도시를 천천히 마음속에서 정리하게 된다.

툴루즈의 오래된 골목들과 까르카손의 아카시아 향도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 갔다.

 

보르도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어느 정도 도시 위로 올라와 있었다.
이른 아침의 고요함은 조금씩 걷히고 있었지만, 도시에는 여전히 느긋한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버스터미널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와 크루아상을 하나씩 먹으며 잠시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강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골목 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오래된 석조 건물들은 아침 햇살 아래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강가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Place de la Bourse 앞에 도착했다.

 

보르도의 대표적인 광장답게 건물들은 햇살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유명한 물의 거울이 조용히 펼쳐져 있었다.

 

얕게 펼쳐진 물 위로 광장을 감싸고 있는 건물들과 푸른 하늘이 조용히 비쳐 있었다.


물결 하나 거의 없는 수면은 광장 전체를 거대한 거울처럼 담아내고 있었고, 그 풍경은 한참을 바라보게 만들 만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가끔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수면 위 풍경도 잔잔하게 흔들렸다.

 

마치 현실과 그림자가 겹쳐진 또 하나의 도시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바라봤다.

 

보르도는 오랜 시간 강물과 와인을 곁에 두고 천천히 익어온 도시 같았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오래된 건물과 골목, 강물의 흐름 속에 조용히 스며든 도시.

 

그래서인지 처음 도착한 낯선 곳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강가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Place des Quinconces 근처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강가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Place des Quinconces 근처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광장 옆으로는 트램이 조용히 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천천히 트램에서 내려 공원 길을 따라 걸어 나왔고, 그 끝에서 거대한 광장이 시야 가득 펼쳐졌다.

광장 중심에는 거대한 기념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분수 위 조각상들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광장에는 어딘가 여유로운 공기가 머물고 있었다.

 

광장 한쪽에는 벼룩시장도 열려 있었다.

빛바랜 엽서와 낡은 은식기, 오래된 시계와 작은 장식품들.

누군가의 시간 속에 머물렀던 물건들이 다시 새로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시장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그러다 작은 가게 한쪽에서 눈길이 가는 작은 도자기 케이스 하나를 발견했다.

예전에는 약을 넣어 다니던 물건이라고 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큼 작았지만, 표면에는 섬세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오래된 시간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하나씩 모으다 보니 어느새 제법 많아진 필케이스들. 이 작은 물건마다 여행의 공기와 풍경이 함께 남아 있다.>

 

 

 

 

시장 골목을 지나 조금 더 걷자 거대한 오크통을 닮은 독특한 법원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르도라는 도시다운 풍경이었다.

 

둥근 곡선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마치 커다란 와인 저장고처럼 보였고, 현대적인 건물인데도 오래된 도시 풍경과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안에는 실제 법정들이 들어서 있다고 했다.
오크통처럼 만들어진 일곱 개의 둥근 공간 하나하나가 모두 재판이 열리는 법정이라고 했다.

와인을 천천히 숙성시키는 오크통처럼, 이곳에서도 사람들의 시간과 이야기들이 조용히 쌓여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르도에서는 와인조차 단순한 술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견디며 완성되는 문화처럼 느껴졌는데, 이상하게 이 법원 건물도 그런 도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법원을 지나 다시 골목을 천천히 걷다 보니, 거리 곳곳에서는 포도덩굴이 담벼락을 따라 조용히 뻗어가고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여린 초록빛 덩굴이 대문 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었고, 또 어떤 골목에서는 창문과 벽을 따라 천천히 번져 가고 있었다.

 

보르도가 와인으로 유명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도시를 걸어보니 와인은 단순한 특산물이 아니라 보르도의 일상과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끝없이 이어지는 포도밭이 펼쳐졌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포도와 함께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골목 사이를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가 고파지면 우리는 눈에 띄는 식당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어디를 들어가도 음식이 참 좋았다.

여행 중에는 이런 작은 즐거움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유명한 맛집보다도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기대 이상으로 좋은 식사를 하게 되는 순간들 말이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마지막 코스로 La Cité du Vin(보르도 와인 박물관)으로 향했다.

강을 따라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자 독특한 곡선 형태의 건물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햇살을 받은 건물 외벽은 마치 와인이 잔 안에서 천천히 흔들리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역사, 향과 맛을 느끼는 방법까지 다양한 체험 공간이 이어졌다.

 

 

 

포도가 자라고 수확되고, 시간이 천천히 스며들어 한 병의 와인이 되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따라 걷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전시만 둘러본 것이 아니라 테이스팅 클래스와 블렌딩 체험에도 참여했다.

 

먼저 잔을 앞에 두고 향을 맡는 시간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그냥 와인 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설명을 듣고 다시 맡아보니 조금씩 다른 향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베리 향, 바닐라 향, 나무 향, 꽃 향.

 

설명을 듣고 나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열심히 향을 구분해 보려 했지만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같은 와인을 마시면서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향과 맛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꽃 향을 말했고, 또 누군가는 나무 향을 이야기했다.

블렌딩 체험 역시 꽤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보르도의 와인은 보통 한 가지 포도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품종을 섞어 만든다고 한다.

우리는 각각 다른 특징을 가진 와인을 조금씩 섞어가며 직접 하나의 맛을 만들어 보았다.

 

어떤 와인은 향이 강했고, 어떤 와인은 부드러웠다. 조금 넣고, 다시 섞고, 또 맛을 본다.

신기하게도 따로 마실 때보다 함께 섞였을 때 훨씬 더 자연스럽고 깊은 맛이 났다.

 

어쩌면 사람도 조금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다른 사람들이 만나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전망 공간에 올라 천천히 와인 한 잔을 마셨다.

 

창밖으로 보르도의 지붕들과 강물이 햇살 아래 조용히 펼쳐져 있었다.

와인에 조금 취하고, 보르도의 공기에 조금 취하고, 도시가 가진 느린 분위기에 조금 더 취해 갔다.

 

해가 천천히 기울 무렵, 도시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보르도빛으로 물들어 갔다.


박물관 앞 잔디 위에는 오래된 토기 와인 저장 항아리 하나가 무심한 듯 놓여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며 보르도의 시간과 와인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여행 정보 | 보르도 (Bordeaux)

- 물의 거울(Miroir d’eau) : Place de la Bourse 앞

- Place des Quinconces : 트램 정류장과 이어진 대형 광장

- 오크통 형태의 보르도 법원 건물

- La Cité du Vin(와인의 도시) : 와인 전시·테이스팅·블렌딩 체험 가능

- 주요 관광지는 강을 따라 도보 이동 가능

- 추천 여행 시간 : 반나절~하루 코스

 

여행 팁

 - 물의 거울은 낮과 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  해 질 무렵부터 야경까지 꼭 함께 보는 것을 추천

 -  강변 산책길은 생각보다 길어 편한 신발이 좋다

 -  트램이 잘 되어 있어 이동이 편하다

 -  5월 초에는 골목 곳곳에서 여린 포도덩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  La Cité du Vin 기본 입장권은 전망대 와인 테이스팅 포함 약 23유로 정도

 -  테이스팅 워크숍은 보통 18~23유로 선이며, 블렌딩·향 체험 클래스는 별도 예약이 필요하다

 -  인기 체험은 영어 진행 프로그램도 있어 미리 시간표를 확인하는 편이 좋다


보르도에는 우리가 걸었던 길 위에도 아직 더 많은 풍경과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보르도 대성당과 오래된 중세 성문, 골목 끝에서 마주했던 작은 광장들까지.
사실 우리는 그 대부분의 장소들을 천천히 걸으며 지나왔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들을 이 짧은 글 안에 하나하나 다 담아내기에는 지면도, 기억도 조금은 부족한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은 그날 우리 마음에 오래 남았던 몇 장면들만 조용히 꺼내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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