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카손(Carcassonne)

 

남프랑스 여행 동안 우리는 툴루즈를 작은 거점처럼 삼고 있었다.

 

딸아이 집에 짐을 풀어놓고 하루는 여기, 하루는 저기. 아침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근교 도시를 찾아 떠났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니 여행이라기보다 잠시 그곳에 살아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5월 어느 새벽이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 전, 조용한 골목길을 지나 우리는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전날 일부러 딸아이 집에서 터미널까지 걸어보며 길을 익혀 두었다. 자칭 철저한 준비파였지만 이상하게도 새벽이 되니 낮에 보던 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골목이 갑자기 낯설어지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방향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골목 하나를 잘못 들어 잠시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여유 있게 출발한 덕분에 천천히 걸어 예정 시간보다 조금 일찍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까까송행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이른 새벽이라 졸린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어느새 깊은 잠에 빠졌고, 주변이 조금 부산해지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도착한 곳은 이미 카르카손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곳을 ‘까까송’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보드게임 이름으로 더 익숙한 곳이지만 실제의 까까송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시간을 품고 있는 도시였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성벽 안에 들어 있는 중세 요새 도시.

 

오드강을 사이에 두고 오래된 시테 지역과 바스티드 지역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우리는 터미널에서 중세도시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목적지보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더 기억에 남는 날들이 있다.

 

그날이 딱 그랬다.

 

걷다가 낯선 골목에 시선이 머물고, 길을 잃었다가 아침 산책 중이던 멋진 노신사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작은 광장에서는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갓 구운 따뜻한 바게트 냄새가 아침 공기 사이로 흘러나왔다.

 

우리는 망설일 것도 없이 바게트 하나를 샀다.

 

갓 나온 빵 특유의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 그대로 전해졌다.

 

그 빵 하나 들고 걷는 길마저 괜히 행복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오래된 다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중세도시와 바스티드 지역을 이어주는 퐁 비외(Pont-Vieux).

 

다리 옆 작은 교회 안은 의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 마치 잠시 공연을 기다리는 공간처럼 보였다.

 

우리는 가장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특별히 화려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회색빛 공간 한가운데 보랏빛 스테인드글라스가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자 오드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은 잿빛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차갑거나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5월의 강가에는 아카시아 꽃이 만개해 있었다.

 

성채는 이미 저 멀리 보이고 있었지만 우리는 또 걸음을 멈췄다.

 

다리 난간에 앉아 한참 동안 꽃향기를 맡았다.

 

순간은 늘 지나간다.

 

그래서 그 순간을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날의 나는 그 향기를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 저장해 두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꺼내 맡을 수 있도록.

 

 

아카시아 향기를 지나 걷다 보니 어느새 성채 앞이었다.

놀랍게도 이 아름다운 성채는 한때 철거될 뻔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정부는 오래된 요새를 철거하기로 결정했지만, 주민들과 건축가, 학자들이 힘을 모아 이를 막아냈다.

 

 

그리고 오랜 복원 작업 끝에 지금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수백 년 전 사람들이 바라보았을 풍경을 그대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자 좁은 돌길과 오래된 집들이 이어졌다.

 

작은 상점과 카페, 레스토랑들이 골목마다 자리하고 있었고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골목 끝 작은 광장에서는 담벼락을 따라 포도넝쿨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아직 작은 초록빛 포도송이들이 조랑조랑 매달려 있었다.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저 그늘 아래 앉아 점심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날도 남편은 바게트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계속 가자.”

 

그래서 또 웃으며 걸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성벽 위로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까까송은 단순히 성 안을 걷는 도시가 아니었다.

 

 

 

 

 

직접 성벽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이곳만의 특별함이었다.

 

돌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자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성 안쪽을 바라보면 오래된 지붕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었다.

 

좁은 골목 사이로 작은 광장과 카페들이 보였고,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 다니는 모습이 마치 오래된 그림 속 장면처럼 느껴졌다.

 

반대로 성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저 멀리 오드강이 흐르고 조금 전 우리가 지나왔던 바스티드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성벽 아래로 펼쳐진 초록빛 들판과 나무들, 그리고 멀리 이어지는 남프랑스 하늘까지.

 

수백 년 전 이곳을 지키던 사람들도 같은 풍경을 바라봤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은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오래전 이 높은 성벽은 도시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었을 것이다.

 

천천히 걷다 보니 까까송이 왜 특별한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오래된 성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안에서 시간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또 하나의 성이 숨어 있었다.

 

‘성 안의 성’이라 불리는 콩탈성(Château Comtal).

거대한 성벽 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성은 마치 오래된 이야기 속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 정보 | 카르카손(Carcassonne)

  • 툴루즈 → 버스 약 1시간 30분
  • 추천 코스 : 퐁 비외 → 오드강 산책길 → 시테 입성 → 성벽 산책로 → 콩탈성
  • 봄(5월)은 아카시아 꽃이 만개하는 시기

입장료 

- 중세 성채(시테) 입장 : 무료

- 콩탈성(Château Comtal) + 성벽 관람 : 성인 기준

- 4월~9월 : 약 19유로

- 10월~3월 : 약 13유로

- 만 18세 미만 무료

- EU 거주 18~25세 일부 무료 혜택 있음 

 

여행 팁

✓ 성채 안만 둘러보고 나오지 말 것. 까까송의 진짜 매력은 성벽 위 산책로에 있다.

    성 안 풍경과 성 밖 오드강 풍경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 오전 일찍 가면 한적한 돌길과 골목을 만날 수 있다. 오후에는 단체 관광객이 많아지는 편이다.

✓ 퐁 비외(Pont-Vieux) 다리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성채 풍경은 꼭 놓치지 말 것. 사진보다 실제 모습이 훨씬 압도적이다.

✓ 가능하면 바스티드 지역 장터를 지나 천천히 걸어 들어갈 것.

     갓 구운 바게트 하나 손에 들고 성채를 향해 걷는 그 시간이. 의외로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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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프랑스 여행 3화 | 툴루즈, 천천히 걷다 마음이 멈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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