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의 성, 샤토 콩탈을 걷다.



거대한 성벽 뒤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성.
가까이 다가갈수록 생각보다 훨씬 묵직한 모습이었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침략을 견뎌낸 성이라 그런지 화려하다기보다 단단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성 안에 또 성이라니.
도대체 왜 이런 구조로 만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문득 스친다.
우리는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를 지나자 가장 먼저 짧은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까르카손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잠시 서서 화면을 바라보다가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스크린 아래에는 까르카손 전체를 축소해 놓은 거대한 목조 모형이 놓여 있었다.
성벽과 탑, 좁은 골목길까지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지나왔던 길도 보이고, 아직 가보지 못한 구석구석도 눈에 들어온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마치 손바닥 위에 작은 도시 하나를 올려놓고 바라보는 것 같았다.
사람 대신 내가 커진 건지, 도시가 작아진 건지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이 작품은 까르카손 장인 루이 라콤이 40년 동안 만들었다고 한다.
40년이라니.
한 도시를 그렇게 오래 바라보며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모형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작은 박물관 공간이 이어졌다.
고대와 중세 조각품, 전쟁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벽화 속 기사들은 금방이라도 말을 타고 뛰어나올 것처럼 생생했다.
한 사람은 가톨릭 십자군, 또 다른 한 사람은 카타르파 기사라고 한다.
천 년 전에도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지키려 했고, 누군가는 빼앗으려 했고, 또 누군가는 살아남으려 했을 것이다.

박물관을 나오자 성벽 산책길이 이어졌다.
그 순간 다시 5월의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바람 속에는 아까 오드강가에서 맡았던 그 아카시아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향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성 안 여기저기에도 하얀 아카시아 꽃이 피어 있었다.
콩탈성의 특별한 점은 성벽을 따라 직접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개의 방어벽 사이 공간인 '리세스(Lices)'.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성 안과 성 밖 풍경이 번갈아 펼쳐진다.



한 바퀴가 약 3km 정도라고 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거리.
하지만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성 안쪽을 바라보면 오래된 주홍빛 지붕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다.
좁은 골목길과 작은 광장, 오래된 건물들이 햇살 아래 조용히 기대어 있다.
반대로 성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오드강이 천천히 흐르고, 드넓은 평원과 포도밭이 이어진다.
멀리 피레네 산맥 능선도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성벽에는 군데군데 작은 틈들이 나 있었다.
예전에는 궁수들이 이곳에서 화살을 쏘고, 적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돌을 떨어뜨리며 도시를 지켰다고 한다.
그 작은 틈 사이로 보이는 풍경들이 참 예뻤다.
주홍빛 지붕들과 초록빛 들판, 그리고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남프랑스 풍경.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시선은 자꾸 아카시아 꽃으로 향했다.
어쩌면 이곳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던 건 전생 때문이 아니라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뒤 산에도 아카시아가 많았다.
과수원 울타리를 따라 하얗게 피어 있던 꽃들.
향기롭고 아름답던 나무들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 베어졌다.
그 자리에 높다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고 나온 고향의 모습이었다.
성벽 위를 걷다 보니 까르카손이라는 이름에 얽힌 전설도 떠올랐다.
카르카스 부인 이야기다.
오랜 포위 속에서도 끝까지 성을 지켜냈다는 여인.
마지막 남은 돼지에게 밀을 먹여 성 밖으로 던졌고, 적들은 성 안에 아직 식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포위를 풀었다고 한다.
물론 전설일 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런 이야기들은 오래 마음에 남는다.
수백 년 전 사람들도 결국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을 테니까.
성벽 위를 천천히 걷는다.
5월 바람이 다시 스쳐 지나간다.
아카시아 향기도 여전히 따라온다.

↑ 성문에 있는 카르카스 부인 흉상과 박물관에 있는 흉상(박물관에 전시된 흉상이 진품이다.
여행 정보 | 콩탈성 (Château Comtal)
- 시테 내부
- 내부 역사 영상 및 박물관 관람 가능
- 리세스(Lices) 성벽 산책로 약 3km
- 관람 소요 시간 : 약 1시간 30분~2시간
여행 팁
✓ 성벽길은 생각보다 길다. 편한 신발은 필수
✓ 성벽 틈 사이 풍경도 놓치지 말 것
✓ 오전에는 비교적 한적하다
✓ 5월이라면 아카시아 향기도 함께 즐겨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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