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에 왔습니다.”
이 말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차분해집니다.
경주는 참 이상한 도시입니다.
어디를 걸어도 그저 오래된 도시를 걷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길 하나를 돌아서면 고분이 나타나고,
조금 더 걸으면 오래된 한옥이 보입니다.
담장 너머에는
몇백 년 전 이곳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흔적이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찾아온 곳은 경주의 교동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날 술은
화려하게 이름을 알린 술이라기보다,
한 집안에서 오랜 세월 정성껏 빚어온 술,
교동법주(校洞法酒)입니다.

교동에는 오래된 집이 있습니다
교동 골목에 들어서면 낮은 담장과 한옥들이 이어집니다.
그 가운데에는 경주 최부자 집으로 알려진 오래된 고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택 앞에 서 있으면 괜히 발걸음도 느려집니다.
요즘은 집도, 음식도, 술도 빠르게 만들어지고 빠르게 소비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조금 다른 시간이 흐르는 듯합니다.
술 한 병을 빚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고, 그 술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교동법주는 그 느린 시간 속에서 이어져 온 술입니다.
경주 교동법주는 경주 최씨 가문에서 대대로 빚어온 가양주로,198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찹쌀과 누룩, 그리고 백 일

교동법주는 토종 찹쌀을 주원료로 빚는 전통 곡주입니다.
그런데 이 술의 맛을 만드는 데에는 재료만큼이나 술을 빚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먼저 찹쌀죽에 누룩을 섞어 밑술을 만듭니다.
그리고 여기에 찹쌀로 지은 고두밥과 누룩, 물 등을 더해 다시 발효시키고 숙성시킵니다.
이렇게 발효와 숙성을 거쳐 맑은 술이 완성되기까지 약 100일이 걸립니다.
술은 재촉한다고 빨리 익는 것이 아니니까요.
사람은 할 일을 다하고 나머지는 술에게 맡겨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옛사람들은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던 것 같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기다리고, 장을 담글 때도 기다리고, 술을 빚을 때도 기다렸으니까요.
화려하지 않아서 오래 남는 술



교동법주는 맑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곡주 특유의 향과 단맛, 그리고 은은한 신맛을 지닌 술로 소개됩니다.
알코올 도수는 대체로 16~18도입니다.
첫 모금에
“와!”
하고 놀라게 하기보다는, 한 모금 마신 뒤 잠시 잔을 내려놓고
“참 곱다.”
하고 말하게 되는 술에 가깝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시간이 지나면 문득 생각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지요.
처음부터 목소리가 크고 존재감이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없이 곁에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문득 떠오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에게 교동법주는 조금 그런 술입니다.
술에도 집안의 시간이 담깁니다
교동법주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오래된 술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술은 경주 최씨 가문에서 가양주로 이어져 왔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최국선은 조선 숙종 때 사옹원 참봉을 지냈고,낙향한 뒤 집안에 술 빚는 법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뒤 술은 집안의 제사와 손님맞이 등에 쓰이며 며느리들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전해졌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 집안에서 술을 빚는다는 것은 단순히 제조법 하나를 물려주는 일과는 다를 겁니다.
어떤 쌀을 고르는지, 밥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누룩은 어떻게 다루는지. 그리고 술이 익어가는 동안 언제 손을 대고, 언제 기다려야 하는지. 그런 것들은 책에 모두 적어놓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손끝의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양주에는 레시피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습니다.
사람의 손과 함께 전해지는 술.
그것이 가양주가 가진 매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법주’라는 이름
그런데 이름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법주(法酒)일까요?
이 이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전해집니다.
일정한 순서와 방법에 따라 빚는 술이라는 설명도 있고, 궁중에서 익힌 술 빚는 법을 가지고 내려와 집안에서 이어왔기 때문에 법주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국가유산 자료에서는 ‘법주’라는 이름의 어원을 하나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름의 유래를 굳이 하나로 정해 말하기보다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름 그대로 ‘교동법주’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술 이름 하나에도 오래된 이야기가 남아 있는 셈입니다.
경주에서는 술도 풍경이 됩니다
교동법주를 생각하며 경주의 골목을 다시 걸어봅니다.
오래된 돌담. 한옥의 처마. 마당에 내려앉은 햇살. 그리고 고택 너머로 보이는 천년의 풍경.
이곳에서 교동법주 한 잔을 마신다면 술맛도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 술이 태어난 동네까지 함께 마시는 기분.
우리가 술을 따라 여행하는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술 한 잔에 집 한 채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안동에서 소주를 만나고, 한산에서 소곡주를 만나고,전주에서 이강주를 만났습니다.
제주에서는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을 만났고,문배주와 낙안 사삼주,당진의 면천두견주까지 찾아갔습니다.
술의 이름도,태어난 곳도 모두 달랐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자신이 태어난 곳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교동법주도 그렇습니다.
이 술을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전통주 한 잔을 마시는 일이 아닐 겁니다.
경주의 오래된 집과한 가문의 전통,그리고 그 술을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잠시 들여다보는 일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오래된 술이란 오래된 레시피가 아니라 오래 지켜온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여행에서는 또 어떤 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다음 잔에서 다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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