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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의 작은 마을 미노리(Minori). 그날 오후는 한여름처럼 뜨거웠다.

딸은 지중해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남편과 나는 해변을 걸으며 햇볕을 즐겼다. 

9월도 하순에 접어들었지만 해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모래사장에 누워 느긋하게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미노리의 여름은 아직 끝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후 3~4시쯤 바다에서 나와 마을 쪽으로 걸었다.

곧장 숙소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워 골목을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성당 앞에 이르렀다.

마침 성당 앞에는 예쁜 웨딩카 한 대가 서 있었고, 안에서는 혼배성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성당 앞 야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바닷물에 젖은 몸도 말릴 겸 잠시 쉬어 가기로 한 것이다.

남편은 맥주를, 딸과 나는 색이 고운 아페롤 스프리츠를 주문했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결혼식 풍경을 지켜보는 것도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음료를 주문하면 간단한 안주를 함께 내주는 곳이 있다.

이날도 작은 안주가 곁들여 나왔다.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른 카페 문화가 재미있어 사진도 한 장 남겼다. ㅎㅎ

 

잠시 후 하객들이 하나둘 성당 밖으로 나오더니 이내 신랑 신부가 계단을 내려왔다.

축하의 함성과 함께 폭죽이 터지고 꽃가루가 흩날렸다.

두 사람은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웨딩카에 올라탔다.

차는 좁은 골목을 따라 천천히 멀어졌다.

 

 

우리가 일부러 찾아간 결혼식은 아니었다.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장면이었다.

낯선 마을의 성당 앞에 앉아 다른 이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잠시나마 우리도 그날의 하객이 된 듯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계획에 없던 순간에 낯선 사람들의 기쁨을 함께하게 될 때가 있다.

 

카페에서 일어나 다시 골목길을 걸었다.

미노리의 골목은 이리저리 이어져 있어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구경할 거리가 많았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브라스밴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마을 골목을 돌며 행진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주민들도 줄지어 따라가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성당 앞에서 결혼식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골목에서 브라스밴드 행렬이라니.

작은 마을에서 하루 동안 참 다양한 풍경을 만난다 싶었다.

 

한동안 행렬을 바라보다 숙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근처 슈퍼에 들러 고기와 채소, 과일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메뉴는 삼겹살과 라면이었다.

영국 집에서부터 챙겨 온 라면은 여행지에서도 어김없이 제 몫을 했다.

 

지중해 바다에서 수영하고 이탈리아 골목을 누비던 하루의 마무리가 삼겹살이다

. 근사한 현지 음식도 좋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이런 저녁이 더없이 반가웠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후식으로 멜론을 자르려던 참이었다.

이날 산 멜론은 어찌나 큰지 수박만큼이나 커 보였다.

그때 창밖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낮에 골목에서 들었던 바로 그 브라스밴드 소리였다.

숙소 가까이까지 왔는지 음악 소리는 점점 커졌고, 사람들의 떠들썩한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우리 가족은 호기심이 참 많다. 궁금한 일이 생기면 그냥 앉아서 지나치지 못한다.

무슨 일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다.

결국 그날도 멜론을 자르던 손을 멈췄다. ㅎㅎ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행렬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더 이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을 뿐이다.

 

밤의 골목에는 브라스밴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고 있었다.

행렬 앞쪽에는 사람 키만 한 성인들의 성상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낮에 보았던 마을의 축제 분위기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성상과 악단,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좁은 골목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숙소에서 삼겹살을 먹고 멜론을 나눠 먹던 평범한 저녁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는 낯선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골목을 걷고 있었다.

 

여행 중에는 이런 순간이 참 좋다. 무언가를 보겠다고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닌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이끌려 따라나서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장면 속에 들어가 있게 된다.

 

나중에 그날의 행사를 찾아보니, 2026년 9월 23일 저녁 미노리의 산타 트로피메나 대성당에서는 성 프란치스코와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를 기리는 미사와 행렬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날은 파드레 피오(Padre Pio)라고도 불리는 성 비오 신부의 기념일이었다. 우리가 보았던 행렬도 이 행사와 관련이 있었던 듯하다.

 

가톨릭 신자인 나에게는 그래서인지 그날의 풍경이 더욱 반갑게 다가왔다. 여행지에서 그곳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신앙의 전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다니.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과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친근했다. 미노리 사람들에게는 해마다 이어지는 익숙한 행사였겠지만, 우리에게는 그 마을의 또 다른 모습을 들여다보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행렬은 성당 앞에서 멈췄다. 성상들이 성당 앞에 자리를 잡은 뒤 신부님의 말씀과 축복이 이어졌다. 우리도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 머물며 미노리 사람들의 신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밤이 깊었지만 골목에는 여전히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릴 만큼 더웠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간간이 더위를 식혀 주었다.

 

돌이켜 보니 참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바다에서 수영하고, 성당 앞 카페에서 우연히 결혼식을 구경하고, 골목에서는 브라스밴드 행렬을 만났다. 저녁에는 가족끼리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다시 음악 소리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아침에 하루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결혼식도 종교 행렬도 우리를 위해 마련된 자리는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기쁨을 나누고 신앙을 이어가는 순간에 우리가 함께했을 뿐이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보면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다닌 날보다 이런 날이 더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한다. 잠시나마 그 마을 사람들의 일상 속에 들어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낯선 신랑 신부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 축하하고, 밤에는 성인들의 행렬을 따라 걸었으니, 마치 결혼한 부부에게 축복을 건넨 데 이어 성인 두 분에게도 축복을 받은 듯한 하루가 아니었을까.

 

물론 우리를 위한 축복은 아니었겠지만, 어쩌다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ㅎㅎ

미노리에서 보낸 9월 23일.

 

그저 바다에서 수영하고 골목을 걷다가 저녁을 먹으며 보낼 평범한 하루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계획에 없던 만남들이 이어지면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날이 되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반짝이던 지중해, 꽃가루가 흩날리던 성당 앞, 밤의 골목을 가득 채우던 브라스밴드 소리.

그날 미노리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계획 없이 그저 눈앞의 풍경을 따라 걷던 우리 가족에게, 오래 기억할 작은 선물 하나를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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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장보기, 마트마다 찾아가는 이유가 있다

영국에서 장을 보러 갈 때면 꼭 챙기는 것이 있다. 바로 슈퍼마켓 회원카드다.

영국에는 테스코(Tesco)의 클럽카드(Clubcard), 세인즈버리(Sainsbury’s)의 넥타(Nectar), 모리슨(Morrisons) 카드처럼 마트마다 회원카드가 있다. 우리도 이 카드들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영국 마트에서는 회원카드가 있으면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 꽤 많다. 카드가 없으면 일반 가격으로 계산되지만, 카드를 제시하면 회원 전용 가격이 적용되는 식이다. 같은 물건인데도 가격 차이가 제법 날 때가 있어 이제는 장을 보러 나설 때 회원카드를 챙기는 일이 자연스러운 습관이 됐다.

남편은 그중에서도 모리슨 카드를 특히 좋아한다. 모리슨에 자기가 좋아하는 와인이 많기 때문이다. 

카드 할인이나 행사 가격을 잘 이용하면 평소에는 조금 망설여지던 와인도 제법 괜찮은 가격에 살 수 있다. 마음에 두었던 와인이 할인 목록에 올라 있으면 남편의 눈길이 먼저 그쪽으로 향한다. 좋아하는 와인을 조금 더 저렴하게 살 수 있으니 모리슨 카드를 아낄 만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여러 마트를 다니는 이유가 회원카드 할인 때문만은 아니다.

마트마다 유난히 손이 가는 물건들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장보기의 중심은 모리슨이다. 고기와 생선, 빵을 비롯해 평소 자주 먹는 식재료는 대부분 이곳에서 산다. 필요한 것들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어 기본 장은 모리슨에서 보는 편이다.

다만 채소나 과일은 그날그날 마음에 드는 것이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리들이나 테스코로 발길을 돌린다. 두 곳을 둘러보다 보면 우리가 찾던 채소나 과일을 만날 때가 있고, 리들에서는 매장에서 갓 구워낸 빵도 자주 사 온다.

생활용품은 알디(Aldi)와 리들(Lidl)을 눈여겨본다.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두 마트를 둘러보며 가격과 품질을 살핀다.

 

그리고 버터와 치즈는 막스앤스펜서(Marks & Spencer, M&S)를 좋아한다.

우리가 즐겨먹는  버터가  이곳에만 있다. 그래서 버터나 치즈가 떨어질 때면 자연스럽게 M&S로 향한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우리 부부에게는 마트마다 나름의 역할이 있는 셈이다.

모리슨에서는 기본 식재료를 사고, 채소와 과일은 리들이나 테스코에서 살펴보고, 생활용품은 알디와 리들을 둘러본다. 버터와 치즈는 M&S에서 챙긴다.

 

그러다 보니 어느 한 곳에서 장을 한 번에 끝내는 날은 드물다. 고기가 떨어지면 모리슨으로, 채소나 과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마트로, 버터와 치즈가 필요하면 M&S로 향한다. 필요한 물건을 따라 이 마트 저 마트를 순례하듯 다니는 것이다.

 

물론 매번 모든 마트를 들르는 것은 아니다. 장 볼 것이 많으면 몇 군데를 차례로 둘러보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이 있는 곳만 골라 가기도 한다. 마트마다 회원카드 할인과 행사 상품도 다르니 가격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국에서 장을 보다 보면 어느새 우리 집에 필요한 물건이 어느 마트에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자주 사는 식재료는 익숙한 곳에서 고르고, 다른 마트에서 마음에 드는 상품을 발견하면 그곳을 다시 찾게 된다.

 

그렇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장바구니는 조금 무거워도 마음은 제법 든든하다. 우리 부부에게 장보기란 그저 식료품을 사는 일이 아니라, 각자 좋아하는 물건을 찾아 여러 마트를 둘러보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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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신사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세요?

단정한 코트에 모자를 눌러쓰고, 한 손에는 우산을 든 채 거리를 걷는 모습. 오래된 영국 영화나 사진을 보면 이런 차림의 남성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모자는 유독 눈에 띄죠.

 

그런데 영국에서는 오래전 모자를 쓰는 일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고 해요. 멋을 내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아예 법으로 착용을 정해 놓았던 시절도 있었거든요.

 

때는 1571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귀족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여섯 살이 넘는 사람들이 일요일과 공휴일에 영국에서 만든 모직 모자를 쓰도록 하는 법이 시행됐습니다. 모자를 쓰지 않으면 벌금까지 내야 했다고 해요. 이 법은 국내 모자 제조업과 양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요일에 모자를 쓰지 않았다고 벌금을 내야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꽤나 별난 법이지요? ㅎㅎㅎ

 

물론 이 법이 영원히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1597년에 폐지됐지만, 당시 모자가 얼마나 중요한 산업이었는지는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양털과 함께 자라난 영국의 모자 문화

영국의 전통 의상을 이야기하다 보면 양모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양을 기르고 털을 깎아 실과 옷감을 만드는 일은 오랫동안 영국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스코틀랜드 국경 지역에서는 중세부터 양모를 이용한 직물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양을 기르기 좋았고, 직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발전한 모직물 산업은 훗날 트위드의 역사와도 연결됩니다. 

 

트위드는 양모로 짠 직물입니다. 표면에 은근한 질감이 있고, 회색이나 갈색처럼 차분한 색에 체크무늬와 헤링본 무늬가 잘 어울립니다. 요즘도 트위드 재킷을 보면 영국의 시골길이나 오래된 저택, 사냥과 골프 같은 전원 활동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하죠.

 

이런 옷차림과 잘 어울리는 모자가 바로 플랫 캡입니다.

 

플랫 캡, 영국의 일상에서 신사의 옷차림까지

플랫 캡은 둥글고 납작한 윗부분에 앞쪽으로 짧은 챙이 달린 모자입니다. 양모나 트위드로 만든 제품이 많고, 모양이 부드러워 일상복에도 잘 어울립니다.
예전에는 노동자와 농부, 장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자를 썼습니다. 추위를 막고 비바람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실용적인 물건이었죠. 16세기 런던에서 쓰던 모직 모자도 보온성과 내구성을 중요하게 여겨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플랫 캡은 전원생활이나 골프, 사냥 같은 활동과 연결됐고, 클래식한 영국식 옷차림을 떠올리게 하는 모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플랫 캡에 트위드 재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어딘가 오래된 영국 영화 속 인물 같기도 합니다. 물론 모자 하나 썼다고 신사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요. ㅎㅎㅎ

 

 

동그란 모양이 인상적인 볼러 햇

영국 신사의 모자를 이야기할 때 볼러 햇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둥글고 단단한 윗부분에 좁은 챙이 달린 모자로, 검은색 제품이 특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자도 처음부터 도시의 멋쟁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어요.

1849년 런던의 모자 제작자 토머스와 윌리엄 볼러가 에드워드 코크의 의뢰를 받아 만들었습니다. 말을 타고 다니는 사냥터 관리인들이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보호하고, 기존의 높은 모자가 쉽게 벗겨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탄생한 모자였지만, 이후 영국의 직장인과 은행원들이 즐겨 쓰면서 도시적인 이미지도 얻게 됐습니다. 한때는 중산층 남성의 정장 차림을 상징하는 모자로 널리 알려졌죠.

 

 

톱햇 (Top Hat)

 

톱햇은 윗부분이 높고 챙이 있는 모자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격식 있는 옷차림이나 공식 행사에서 자주 볼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의례나 특별한 행사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높고 매끈한 모양이 특징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격식 있는 남성 복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공식 행사나 특별한 자리에 어울리는 모자였죠. 오늘날에도 영국의 전통적인 신사 이미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모자입니다.

 

트위드와 양모 모자

트위드는 모자 이름이 아니라 양모 등을 짜서 만든 직물의 한 종류입니다. 잔잔한 체크무늬와 자연스러운 색감이 특징이며, 플랫 캡과 재킷 등에 널리 활용돼 왔습니다. 영국의 양모 산업과 전통적인 옷차림을 함께 소개하기 좋은 소재예요.

 

 

플랫 캡과 볼러 햇, 톱햇은 모양부터 쓰임까지 서로 다릅니다. 같은 모자라도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썼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긴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요즘 영국 거리에서는 어떨까?

물론 지금 영국에서 모든 남성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출근길에는 후드가 달린 점퍼를 입거나 운동화를 신고 걷는 사람이 더 흔하죠. 전통적인 모자를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도 있지만, 특별한 옷차림이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플랫 캡이나 트위드 모자는 여전히 클래식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습니다. 볼러 햇과 톱햇도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나 특정한 전통 의상에서 볼 수 있고요.

 

이렇게 보면 영국 신사의 모자라는 이미지도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추위를 막거나 머리를 보호하려고 썼고, 어떤 시기에는 국내 산업을 지키기 위해 법으로 착용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직업과 계층, 유행에 따라 모양과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1571년에는 모직 모자를 쓰도록 법까지 만들었다니, 당시 사람들에게 모자는 단순한 패션 소품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양털을 기르고, 실을 만들고, 옷감과 모자를 제작하는 일에 많은 사람의 생계가 달려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마음에 드는 모자를 골라 쓰면 그만입니다. 모자를 쓰지 않는다고 벌금을 걱정할 일도 없고요. ㅎㅎㅎ

 

영국의 거리를 걷다가 플랫 캡을 쓴 사람을 만나면 예전보다 조금 더 눈길이 갈 것 같습니다. 모자의 모양뿐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진 양모 산업과 옷차림의 변화까지 생각나지 않을까요?

 

늘 보던 물건도 유래를 알고 나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영국 신사의 모자도 그런 것 중 하나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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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가을은 단풍보다 바람이 먼저다.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면 나뭇잎은 제법 노랗게 물들어 있고, 햇살도 잠깐 비친다. 오늘은 좀 괜찮으려나 싶어 옷을 챙겨 입고 가방에 우산까지 넣는다. 나름 단단히 준비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생각이 달라진다.

 

얌전하던 바람이 갑자기 얼굴을 바꾸고 달려든다. 우산은 펼치자마자 뒤집힐 듯 흔들리고,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날린다. 한 손으로 우산을 붙들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누르다 보면 우습기도 하다. 이러려고 굳이 머리를 감고 나왔나 싶다.

 

영국 날씨는 도무지 한 가지 얼굴만 보여주는 법이 없다. 비가 쏟아지다가도 어느새 해가 나고, 반가운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저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온다. 날씨 앱을 꼼꼼히 확인하고 나왔는데도 허탕을 치는 날이 있다. 예보가 틀린 건지, 날씨가 마음을 바꾼 건지 알 수가 없다.

 

요즘 영국에는 거센 바람과 폭우를 동반한 폭풍이 찾아오고 있다. 강한 바람에 교통이 지연되거나 일부 지역에서 정전이 발생하는 등 날씨로 인한 불편도 이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영국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날씨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처음에는 특별히 할 말이 없으니 날씨를 묻나 싶었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침에 입고 나갈 옷부터 외출 시간까지, 날씨 하나에 하루의 계획이 달라진다. 날씨 이야기는 그저 인사치레가 아니라 꽤 현실적인 관심사인 셈이다.

 

나 역시 달라졌다. 예전에는 옷을 고를 때 어울리는 색이나 모양부터 봤다면, 이제는 비에 젖지 않을지, 바람이 불면 춥지 않을지부터 따진다. 공들여 손질한 머리도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모자는 쓸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하는 날도 많다. 현관을 나서기 전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는 버릇도 생겼다.

 

그렇다고 영국의 가을이 마냥 얄밉기만 한 건 아니다.

비바람에 시달리다 따뜻한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면, 그 순간만큼은 참 잘 들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젖은 외투를 벗어 걸고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다.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 한 모금 마시면 얼었던 몸이 조금씩 풀린다. 창밖에서는 사람들이 우산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바삐 지나간다. 방금 전까지 나도 저 사람들 틈에서 우산과 씨름하고 있었다는 게 조금 우습다.

비싼 커피도, 특별한 디저트도 필요 없다. 밖에서 종일 바람에 쫓기다가 잠깐 앉아 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런 날에는 커피 맛보다 따뜻한 실내가 더 반갑다.

 

물론 집을 나설 때마다 우산 앞에서 고민하는 일은 여전하다. 작고 가벼운 우산은 바람이 불면 불안하고, 튼튼한 우산은 가방

에 넣기엔 영 부담스럽다. 큰 우산을 챙기면 비가 그치고, 그냥 나서면 어김없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어쩌면 영국 날씨는 내가 우산을 챙겼는지 안 챙겼는지 몰래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참 성가신 일이다. ㅎㅎㅎ

 

요즘은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예전처럼 투덜거리지만은 않는다. 비가 오면 잠깐 처마 밑에 서 있고,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걷는다. 그러다 햇살이 비치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 걸음을 늦추기도 한다. 거창한 깨달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날씨를 붙잡고 씨름해 봐야 나만 지칠 뿐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오늘도 문을 나서기 전 잠시 망설인다. 우산을 챙길까, 모자도 써야 하나. 결국 둘 다 들고 나가기로 한다. 짐이 조금 늘더라도 머리와 옷이 엉망이 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다.

 

영국의 가을에는 우산 하나로는 어림도 없다. 바람까지 상대하려면 준비도 요령도 필요하다. 그래도 어쩌다 비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면, 이 변덕스러운 계절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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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전날 미리 짐을 챙겨둔 덕분에 아침은 간단히 먹고 숙소를 나섰다. 이제 나폴리를 떠나 아말피 해안으로 간다.

 

나폴리에서 보낸 4박 5일이 꽤 좋았던 터라 떠나려니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새로운 곳에서 며칠을 보낼 생각에 마음이 다시 들떴다.

 

나폴리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살레르노(Salerno)로 향했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우리가 묵을 미노리(Minori)까지 갈 예정이었다. 딸아이가 배표도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해 두어 별다른 걱정 없이 출발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ㅎㅎ

 

배를 놓칠 뻔한 점심시간

살레르노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넘어 있었다.

항구로 가기 전 점심부터 먹기로 하고 근처 피아디나 가게에 들어갔다.

이탈리아 여행을 몇 번 해본 딸아이가 여기까지 왔으니 피아디나도 먹어봐야 한다고 했다.

얇고 납작한 빵에 여러 재료를 넣어 접어 먹는 음식인데, 나는 좋아하는 루콜라와 아보카도가 들어간 것으로 골랐다. 남편과 딸아이는 햄과 치즈가 들어간 것을 주문했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ㅎㅎ

 

처음에는 시간이 넉넉한 줄 알고 느긋하게 먹고 있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배 출발 시간을 다시 확인하더니 갑자기 말했다.

 

"엄마,아빠, 배 15분 뒤에 출발한대!"

 

그때부터 마음이 급해졌다. 

먹던 음식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항구를 향해 뛰었다. 평소 같으면 금방 걸어갈 거리인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배가 이미 승객들을 태우고 있었다. 눈앞에 배가 보이는데도 혹시 놓칠까 봐 마지막까지 서둘렀다. 다행히 무사히 탈 수 있었다.

 

배에 타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맛있는 점심을 여유롭게 먹으려다 하마터면 배를 놓칠 뻔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긴다. 지나고 나면 웃음이 나지만, 그 순간만큼은 얼마나 마음이 바빴는지 모른다. ㅎㅎ

배를 타고 아말피 해안으로

배가 살레르노 항구를 벗어나자 지중해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해안을 따라가다 보니 가파른 절벽 위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저런 곳에 집을 짓고 살아갈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땅이 평평하지도 않고 오르내리기도 쉽지 않을 텐데,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모습이 문득 궁금해졌다.

멀리서 바라본 집들은 저마다 다른 모양과 색을 띠고 있었지만, 한데 모여 해안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저 집마다 누군가의 하루가 담겨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니 눈앞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햇빛이 닿는 곳마다 바다색도 조금씩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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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해안을 따라 달리다가 중간중간 작은 항구에 멈췄다. 사람들이 내리고 새로운 승객들이 탔다. 잠깐씩 들르는 마을마다 풍경이 달라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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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 해안의 마을들은 버스로도 오갈 수 있지만, 해안도로가 좁고 구불구불한 곳이 많다고 한다. 배를 타면 바다에서 마을을 바라보며 이동할 수 있으니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 우리도 배를 타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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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다와 해안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미노리에 도착했다. 살레르노에서 출발해 40분쯤 지났을 때였다.

작은 항구 마을, 미노리

배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바로 해변이 보였다. 해변은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바닷속에서 수영하는 사람들, 햇볕을 쬐며 누워 있는 사람들, 파라솔 아래에서 쉬는 사람들까지.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해변을 지나 숙소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길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 앞 화분에는 이 지역 특산물인 레몬이 익어가고 있었고, 오래된 토분과 돌화분이 골목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작은 상점들도 하나둘 문을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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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예쁜 화분이 보이면 걸음을 늦추고, 마음에 드는 골목이 나오면 사진을 찍었다. 특별히 어디를 찾아가지 않아도 구경할 것들이 많았다. 그저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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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골목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조금 걷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 멈춰 서고, 다시 걷다 보면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미노리에서의 첫인상은 그렇게 소박하게 시작됐다.

조금 더 걸으니 우리가 예약한 숙소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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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탈리아 전통 아파트(레지던스 호텔)였는데, 주인이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열쇠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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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벽과 잘 어울리는 가구, 곳곳에 놓인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 정성껏 살아가는 집에 잠시 초대받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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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이곳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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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곳에서 3박 4일을 보낼 예정이다.

짐을 풀고 잠시 쉬려는데 딸아이가 해변으로 나가자고 했다. 얼른 바다에 들어가 지중해에서 수영하고 싶다며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딸아이는 물을 정말 좋아한다. 바다든 수영장이든 물만 보면 뛰어들고 싶어 하는 아이다. 어쩌면 전생에 인어였던 건 아닐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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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함께 수영하고 싶었지만, 우리는 내일부터 들어가기로 했다. 일단 딸아이부터 바다에 보내주기로 하고, 우리도 산책할 겸 함께 해변으로 나섰다.


저희 가족의 여행 이야기를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 글을 읽으며 잠시나마 이탈리아의 골목을 걷고,

푸른 바다를 함께 바라보는 기분이 드셨다면 참 기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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