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덕 한 뿌리가 술이 되었다, 순천 낙안 사삼주 이야기」
참 멀리도 왔습니다.
안동에서는 뜨거운 불을 지나 태어난 안동소주를 만났고,
한산에서는 한 잔 마시면 자꾸만 다음 잔을 찾게 된다는 한산소곡주를 만났습니다.
전라도에서는 배와 생강이 만나 향을 만들어낸 이강주를 만났고,
제주에서는 좁쌀로 빚은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지역 술 여행이 닿은 곳은
전라남도 순천 낙안입니다.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곳.
낮은 돌담이 이어지고,
초가집 지붕이 보이고,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옛날 마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드는 곳.
바로 낙안읍성입니다.
그곳에서 오늘 우리가 만날 술은 조금 특별합니다.
인삼도 아니고,
산삼도 아닙니다.
더덕 한 뿌리가 술이 된 이야기.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사삼주(沙蔘酒)입니다.
사삼주? '모래에서 나는 삼'이라는 뜻일까요?
이름부터 조금 낯섭니다.
사삼(沙蔘).
전통적으로 더덕과 관련된 이름으로 쓰여 온 말입니다.
순천의 사삼주는 찹쌀과 더덕을 주요 재료로 빚어,
더덕 특유의 향과 은은한 쌉싸름함을 술에 담아낸 전통주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쉽게 말하면,
“더덕으로 빚은 술.”
그런데 그냥 '더덕주'라고 부르기에는
왠지 조금 아쉽습니다.
사삼주.
이 이름 안에는 단순히 재료 하나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집집마다 술을 빚어왔던 시간과
그 술을 기억하고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술 한 병보다 그 술을 빚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낙안읍성에서 만난 술

낙안읍성을 걸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낮은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괜히 발걸음도 조금 느려집니다.
초가지붕을 바라보고 있으면
'예전 사람들은 이 골목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곳에서는 왠지
화려하고 유명한 술보다는,
누군가 오래전 자기 집 부엌에서 조용히 빚었을 것 같은 술이
더 잘 어울립니다.
사삼주가 바로 그런 술입니다.
사삼주는 보성 박씨 집안에서 가양주로 전해져 온 술과 인연이 있으며,
이후 낙안 지역에서 전통주의 모습으로 이어져 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삼주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누가 이 술을 처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도 생기지만,
저는 오히려 이런 생각이 먼저 듭니다.
“이 술은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았을까?”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날에 꺼내는 술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손님이 찾아왔을 때
조심스럽게 내놓던 술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그 술을 빚는 법을 다음 사람에게 가르쳐 주었겠지요.
술이 이어졌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억도 함께 이어졌다는 뜻인지 모릅니다.
찹쌀과 누룩, 그리고 더덕
사삼주의 시작은 다른 우리 전통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곡물이 있고,
누룩이 있고,
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덕이 더해집니다.
찹쌀로 고두밥을 만들고,
누룩과 물을 더해 발효시킨 뒤
제조 과정에서 더덕을 넣어 사삼주만의 향과 맛을 만들어냅니다.
결국 술을 만드는 것은
재료를 한데 넣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발효가 잘되기를 기다리고,
술이 제맛을 찾아가기를 기다리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
더덕의 향이 술 속에 천천히 스며듭니다.
그런데 이 술에는 더덕이 있습니다

사삼주 이야기를 하면서
더덕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더덕은 음식으로 먹어도 향이 참 독특합니다.
향긋하면서도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살짝 쌉싸름한 맛이 남습니다.
사삼주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향이라기보다
은은하게 다가왔다가
마신 뒤에 더덕 특유의 개성이 천천히 남습니다.
전통주 기행에서도 사삼주의 특징을
달콤한 향과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약간의 쌉싸름한 맛으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삼주는
한 모금 마시고 바로 판단하기보다는,
천천히 마셔볼수록 더 재미있는 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조용하지만, 나중에 기억나는 술
세상에는 첫인상이 아주 강한 술이 있습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와, 이 술 정말 세다!”
하고 바로 기억에 남는 술.
안동소주처럼 힘 있게 다가오는 술도 있고,
문배주처럼 독특한 향으로 기억되는 술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삼주는 조금 다릅니다.
처음부터 큰 목소리로
자기를 드러내는 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은은한 향이 먼저 오고,
부드럽게 넘어가고,
마지막에 더덕의 쌉싸름한 맛이 살짝 남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맛이 자꾸 생각납니다.
참 사람하고 비슷하지 않나요?
처음 만났을 때는 별다른 인상을 주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
'그때 그 사람이 참 괜찮았지.'
하고 뒤늦게 떠오르는 사람.
저는 사삼주가 조금 그런 술 같습니다.
조용하지만 오래 기억되는 술.
왜 하필 더덕이었을까요?
우리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통주를 하나씩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술을 빚었다는 것입니다.
제주에서는 좁쌀이 술이 되었고,
전라도에서는 배와 생강이 술에 향을 더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꽃을 넣고,
어떤 곳에서는 솔잎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낙안에서는
더덕이 술을 만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똑같은 쌀과 물을 가지고도
사람이 사는 곳에 따라 술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곳에서 자라는 곡물이 다르고,
그곳에서 나는 식물이 다르고,
무엇보다 그 술을 빚는 사람들의 손길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우리 전통주를 따라 여행하다 보면
결국 술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역의 풍경을 보고,
그곳의 음식을 만나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술 한 잔이
지역의 작은 지도처럼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술을 따라 떠난 우리나라 여행
지금까지 참 먼 길을 왔습니다.
🥃 경상북도 안동 — 안동소주
뜨거운 불을 지나 만들어지는
강렬한 증류주의 깊은 맛을 만났습니다.
🍶 충청남도 한산 — 한산소곡주
부드럽고 달콤한 맛으로
'앉은뱅이 술'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술을 만났습니다.
🍐 전라도 — 이강주
배와 생강이 만나
향기로운 술이 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제주 — 오메기술과 고소리술
섬의 좁쌀이 발효주가 되고,
다시 증류주가 되는 과정을 만났습니다.
🍶 서북 지역 — 문배주
배를 넣지 않았는데도
배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향을 가진 술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 전라남도 순천 낙안 — 사삼주
더덕 한 뿌리가
술이 된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놓고 보니
정말 재미있습니다.
같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술의 모습이 이렇게 다릅니다.
🚗 그런데 아직 만나지 못한 술이 많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주는
그저 오래된 술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곳에서 나는 재료가 있고,
그 재료를 술로 만들어온 사람이 있고,
그 술을 마셔온 사람들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를 알게 될수록
궁금한 술이 또 생깁니다.
“그럼 다른 지역에는 어떤 술이 있을까?”
찾아보니 아직도 만나지 못한 술이 참 많습니다.
이름부터 궁금한 술도 있고,
꽃을 넣어 빚는 술도 있고,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술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술 여행을
여기서 끝내기는 조금 아쉽습니다.
낙안의 돌담길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다시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겠습니다.
다음 여행지는 충남 당진입니다
다음에 찾아갈 곳은
충청남도 당진, 면천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날 술은
이름부터 조금 낯섭니다.
면천두견주.
그런데 이 술에는
더덕 대신 아주 예쁜 재료가 들어갑니다.
바로 진달래꽃입니다.
봄이 되면 산과 들에 피어나는
그 진달래꽃이 술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지요.
낙안에서는 땅속에 숨어 있던
더덕 한 뿌리가 술이 되었는데,
다음 여행에서는
봄날 산자락에 피어난 꽃 한 줌이 술이 됩니다.
그런데 면천두견주에는
꽃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흥미로운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픈 아버지를 위해 술을 빚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술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 앞에 놓이게 된 사연도 있습니다.
과연 진달래꽃은
어떻게 술이 되었을까요?
그리고 꽃으로 빚은 술에서는
어떤 향과 맛이 날까요?
다음 여행에서는
낙안의 더덕 향을 뒤로하고,
봄꽃 향기를 따라 충남 당진 면천으로 가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진달래꽃이 술이 되는 이야기,
면천두견주입니다. 🌸🍶
다음 잔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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