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신사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세요?
단정한 코트에 모자를 눌러쓰고, 한 손에는 우산을 든 채 거리를 걷는 모습. 오래된 영국 영화나 사진을 보면 이런 차림의 남성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모자는 유독 눈에 띄죠.
그런데 영국에서는 오래전 모자를 쓰는 일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고 해요. 멋을 내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아예 법으로 착용을 정해 놓았던 시절도 있었거든요.
때는 1571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귀족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여섯 살이 넘는 사람들이 일요일과 공휴일에 영국에서 만든 모직 모자를 쓰도록 하는 법이 시행됐습니다. 모자를 쓰지 않으면 벌금까지 내야 했다고 해요. 이 법은 국내 모자 제조업과 양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요일에 모자를 쓰지 않았다고 벌금을 내야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꽤나 별난 법이지요? ㅎㅎㅎ
물론 이 법이 영원히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1597년에 폐지됐지만, 당시 모자가 얼마나 중요한 산업이었는지는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양털과 함께 자라난 영국의 모자 문화
영국의 전통 의상을 이야기하다 보면 양모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양을 기르고 털을 깎아 실과 옷감을 만드는 일은 오랫동안 영국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특히 스코틀랜드 국경 지역에서는 중세부터 양모를 이용한 직물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양을 기르기 좋았고, 직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발전한 모직물 산업은 훗날 트위드의 역사와도 연결됩니다.
트위드는 양모로 짠 직물입니다. 표면에 은근한 질감이 있고, 회색이나 갈색처럼 차분한 색에 체크무늬와 헤링본 무늬가 잘 어울립니다. 요즘도 트위드 재킷을 보면 영국의 시골길이나 오래된 저택, 사냥과 골프 같은 전원 활동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하죠.
이런 옷차림과 잘 어울리는 모자가 바로 플랫 캡입니다.
플랫 캡, 영국의 일상에서 신사의 옷차림까지

플랫 캡은 둥글고 납작한 윗부분에 앞쪽으로 짧은 챙이 달린 모자입니다. 양모나 트위드로 만든 제품이 많고, 모양이 부드러워 일상복에도 잘 어울립니다.
예전에는 노동자와 농부, 장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자를 썼습니다. 추위를 막고 비바람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실용적인 물건이었죠. 16세기 런던에서 쓰던 모직 모자도 보온성과 내구성을 중요하게 여겨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플랫 캡은 전원생활이나 골프, 사냥 같은 활동과 연결됐고, 클래식한 영국식 옷차림을 떠올리게 하는 모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플랫 캡에 트위드 재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어딘가 오래된 영국 영화 속 인물 같기도 합니다. 물론 모자 하나 썼다고 신사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요. ㅎㅎㅎ
동그란 모양이 인상적인 볼러 햇

영국 신사의 모자를 이야기할 때 볼러 햇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둥글고 단단한 윗부분에 좁은 챙이 달린 모자로, 검은색 제품이 특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자도 처음부터 도시의 멋쟁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어요.
1849년 런던의 모자 제작자 토머스와 윌리엄 볼러가 에드워드 코크의 의뢰를 받아 만들었습니다. 말을 타고 다니는 사냥터 관리인들이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보호하고, 기존의 높은 모자가 쉽게 벗겨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탄생한 모자였지만, 이후 영국의 직장인과 은행원들이 즐겨 쓰면서 도시적인 이미지도 얻게 됐습니다. 한때는 중산층 남성의 정장 차림을 상징하는 모자로 널리 알려졌죠.
톱햇 (Top Hat)

톱햇은 윗부분이 높고 챙이 있는 모자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격식 있는 옷차림이나 공식 행사에서 자주 볼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의례나 특별한 행사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높고 매끈한 모양이 특징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격식 있는 남성 복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공식 행사나 특별한 자리에 어울리는 모자였죠. 오늘날에도 영국의 전통적인 신사 이미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모자입니다.
트위드와 양모 모자

트위드는 모자 이름이 아니라 양모 등을 짜서 만든 직물의 한 종류입니다. 잔잔한 체크무늬와 자연스러운 색감이 특징이며, 플랫 캡과 재킷 등에 널리 활용돼 왔습니다. 영국의 양모 산업과 전통적인 옷차림을 함께 소개하기 좋은 소재예요.
플랫 캡과 볼러 햇, 톱햇은 모양부터 쓰임까지 서로 다릅니다. 같은 모자라도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썼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긴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요즘 영국 거리에서는 어떨까?
물론 지금 영국에서 모든 남성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출근길에는 후드가 달린 점퍼를 입거나 운동화를 신고 걷는 사람이 더 흔하죠. 전통적인 모자를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도 있지만, 특별한 옷차림이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플랫 캡이나 트위드 모자는 여전히 클래식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습니다. 볼러 햇과 톱햇도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나 특정한 전통 의상에서 볼 수 있고요.
이렇게 보면 영국 신사의 모자라는 이미지도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추위를 막거나 머리를 보호하려고 썼고, 어떤 시기에는 국내 산업을 지키기 위해 법으로 착용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직업과 계층, 유행에 따라 모양과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1571년에는 모직 모자를 쓰도록 법까지 만들었다니, 당시 사람들에게 모자는 단순한 패션 소품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양털을 기르고, 실을 만들고, 옷감과 모자를 제작하는 일에 많은 사람의 생계가 달려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마음에 드는 모자를 골라 쓰면 그만입니다. 모자를 쓰지 않는다고 벌금을 걱정할 일도 없고요. ㅎㅎㅎ
영국의 거리를 걷다가 플랫 캡을 쓴 사람을 만나면 예전보다 조금 더 눈길이 갈 것 같습니다. 모자의 모양뿐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진 양모 산업과 옷차림의 변화까지 생각나지 않을까요?
늘 보던 물건도 유래를 알고 나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영국 신사의 모자도 그런 것 중 하나인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