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의 작은 마을 미노리(Minori). 그날 오후는 한여름처럼 뜨거웠다.
딸은 지중해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남편과 나는 해변을 걸으며 햇볕을 즐겼다.
9월도 하순에 접어들었지만 해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모래사장에 누워 느긋하게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미노리의 여름은 아직 끝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후 3~4시쯤 바다에서 나와 마을 쪽으로 걸었다.
곧장 숙소로 돌아가기에는 아쉬워 골목을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성당 앞에 이르렀다.
마침 성당 앞에는 예쁜 웨딩카 한 대가 서 있었고, 안에서는 혼배성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성당 앞 야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바닷물에 젖은 몸도 말릴 겸 잠시 쉬어 가기로 한 것이다.
남편은 맥주를, 딸과 나는 색이 고운 아페롤 스프리츠를 주문했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결혼식 풍경을 지켜보는 것도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음료를 주문하면 간단한 안주를 함께 내주는 곳이 있다.
이날도 작은 안주가 곁들여 나왔다.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른 카페 문화가 재미있어 사진도 한 장 남겼다. ㅎㅎ

잠시 후 하객들이 하나둘 성당 밖으로 나오더니 이내 신랑 신부가 계단을 내려왔다.
축하의 함성과 함께 폭죽이 터지고 꽃가루가 흩날렸다.
두 사람은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웨딩카에 올라탔다.
차는 좁은 골목을 따라 천천히 멀어졌다.



우리가 일부러 찾아간 결혼식은 아니었다.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장면이었다.
낯선 마을의 성당 앞에 앉아 다른 이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순간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잠시나마 우리도 그날의 하객이 된 듯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계획에 없던 순간에 낯선 사람들의 기쁨을 함께하게 될 때가 있다.
카페에서 일어나 다시 골목길을 걸었다.
미노리의 골목은 이리저리 이어져 있어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구경할 거리가 많았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브라스밴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마을 골목을 돌며 행진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주민들도 줄지어 따라가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성당 앞에서 결혼식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골목에서 브라스밴드 행렬이라니.
작은 마을에서 하루 동안 참 다양한 풍경을 만난다 싶었다.
한동안 행렬을 바라보다 숙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근처 슈퍼에 들러 고기와 채소, 과일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메뉴는 삼겹살과 라면이었다.
영국 집에서부터 챙겨 온 라면은 여행지에서도 어김없이 제 몫을 했다.
지중해 바다에서 수영하고 이탈리아 골목을 누비던 하루의 마무리가 삼겹살이다
. 근사한 현지 음식도 좋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이런 저녁이 더없이 반가웠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후식으로 멜론을 자르려던 참이었다.
이날 산 멜론은 어찌나 큰지 수박만큼이나 커 보였다.
그때 창밖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낮에 골목에서 들었던 바로 그 브라스밴드 소리였다.
숙소 가까이까지 왔는지 음악 소리는 점점 커졌고, 사람들의 떠들썩한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우리 가족은 호기심이 참 많다. 궁금한 일이 생기면 그냥 앉아서 지나치지 못한다.
무슨 일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다.
결국 그날도 멜론을 자르던 손을 멈췄다. ㅎㅎ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행렬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더 이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을 뿐이다.
밤의 골목에는 브라스밴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고 있었다.
행렬 앞쪽에는 사람 키만 한 성인들의 성상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낮에 보았던 마을의 축제 분위기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성상과 악단,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좁은 골목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숙소에서 삼겹살을 먹고 멜론을 나눠 먹던 평범한 저녁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는 낯선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골목을 걷고 있었다.
여행 중에는 이런 순간이 참 좋다. 무언가를 보겠다고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닌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이끌려 따라나서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장면 속에 들어가 있게 된다.

나중에 그날의 행사를 찾아보니, 2026년 9월 23일 저녁 미노리의 산타 트로피메나 대성당에서는 성 프란치스코와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를 기리는 미사와 행렬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날은 파드레 피오(Padre Pio)라고도 불리는 성 비오 신부의 기념일이었다. 우리가 보았던 행렬도 이 행사와 관련이 있었던 듯하다.
가톨릭 신자인 나에게는 그래서인지 그날의 풍경이 더욱 반갑게 다가왔다. 여행지에서 그곳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신앙의 전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다니.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과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친근했다. 미노리 사람들에게는 해마다 이어지는 익숙한 행사였겠지만, 우리에게는 그 마을의 또 다른 모습을 들여다보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행렬은 성당 앞에서 멈췄다. 성상들이 성당 앞에 자리를 잡은 뒤 신부님의 말씀과 축복이 이어졌다. 우리도 마지막까지 그 자리에 머물며 미노리 사람들의 신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밤이 깊었지만 골목에는 여전히 여름의 열기가 남아 있었다. 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릴 만큼 더웠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간간이 더위를 식혀 주었다.
돌이켜 보니 참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바다에서 수영하고, 성당 앞 카페에서 우연히 결혼식을 구경하고, 골목에서는 브라스밴드 행렬을 만났다. 저녁에는 가족끼리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다시 음악 소리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아침에 하루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결혼식도 종교 행렬도 우리를 위해 마련된 자리는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기쁨을 나누고 신앙을 이어가는 순간에 우리가 함께했을 뿐이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보면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다닌 날보다 이런 날이 더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한다. 잠시나마 그 마을 사람들의 일상 속에 들어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낯선 신랑 신부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 축하하고, 밤에는 성인들의 행렬을 따라 걸었으니, 마치 결혼한 부부에게 축복을 건넨 데 이어 성인 두 분에게도 축복을 받은 듯한 하루가 아니었을까.
물론 우리를 위한 축복은 아니었겠지만, 어쩌다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ㅎㅎ
미노리에서 보낸 9월 23일.
그저 바다에서 수영하고 골목을 걷다가 저녁을 먹으며 보낼 평범한 하루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계획에 없던 만남들이 이어지면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날이 되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반짝이던 지중해, 꽃가루가 흩날리던 성당 앞, 밤의 골목을 가득 채우던 브라스밴드 소리.
그날 미노리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계획 없이 그저 눈앞의 풍경을 따라 걷던 우리 가족에게, 오래 기억할 작은 선물 하나를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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