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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덕 한 뿌리가 술이 되었다, 순천 낙안 사삼주 이야기」

참 멀리도 왔습니다.

안동에서는 뜨거운 불을 지나 태어난 안동소주를 만났고,
한산에서는 한 잔 마시면 자꾸만 다음 잔을 찾게 된다는 한산소곡주를 만났습니다.

전라도에서는 배와 생강이 만나 향을 만들어낸 이강주를 만났고,
제주에서는 좁쌀로 빚은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지역 술 여행이 닿은 곳은
전라남도 순천 낙안입니다.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곳.

낮은 돌담이 이어지고,
초가집 지붕이 보이고,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옛날 마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드는 곳.

바로 낙안읍성입니다.

그곳에서 오늘 우리가 만날 술은 조금 특별합니다.

인삼도 아니고,

산삼도 아닙니다.

더덕 한 뿌리가 술이 된 이야기.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사삼주(沙蔘酒)입니다. 


사삼주? '모래에서 나는 삼'이라는 뜻일까요?

이름부터 조금 낯섭니다.

사삼(沙蔘).

전통적으로 더덕과 관련된 이름으로 쓰여 온 말입니다.

순천의 사삼주는 찹쌀과 더덕을 주요 재료로 빚어,
더덕 특유의 향과 은은한 쌉싸름함을 술에 담아낸 전통주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쉽게 말하면,

“더덕으로 빚은 술.”

그런데 그냥 '더덕주'라고 부르기에는
왠지 조금 아쉽습니다.

사삼주.

이 이름 안에는 단순히 재료 하나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집집마다 술을 빚어왔던 시간과
그 술을 기억하고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술 한 병보다 그 술을 빚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릅니다.


낙안읍성에서 만난 술


낙안읍성을 걸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낮은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괜히 발걸음도 조금 느려집니다.

초가지붕을 바라보고 있으면
'예전 사람들은 이 골목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곳에서는 왠지
화려하고 유명한 술보다는,

누군가 오래전 자기 집 부엌에서 조용히 빚었을 것 같은 술
더 잘 어울립니다.

사삼주가 바로 그런 술입니다.

사삼주는 보성 박씨 집안에서 가양주로 전해져 온 술과 인연이 있으며,
이후 낙안 지역에서 전통주의 모습으로 이어져 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삼주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누가 이 술을 처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도 생기지만,

저는 오히려 이런 생각이 먼저 듭니다.

“이 술은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았을까?”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날에 꺼내는 술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손님이 찾아왔을 때
조심스럽게 내놓던 술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그 술을 빚는 법을 다음 사람에게 가르쳐 주었겠지요.

술이 이어졌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억도 함께 이어졌다는 뜻인지 모릅니다.


찹쌀과 누룩, 그리고 더덕

사삼주의 시작은 다른 우리 전통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곡물이 있고,

누룩이 있고,

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덕이 더해집니다.

찹쌀로 고두밥을 만들고,
누룩과 물을 더해 발효시킨 뒤
제조 과정에서 더덕을 넣어 사삼주만의 향과 맛을 만들어냅니다.

결국 술을 만드는 것은
재료를 한데 넣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발효가 잘되기를 기다리고,
술이 제맛을 찾아가기를 기다리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
더덕의 향이 술 속에 천천히 스며듭니다.


그런데 이 술에는 더덕이 있습니다

사삼주 이야기를 하면서
더덕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더덕은 음식으로 먹어도 향이 참 독특합니다.

향긋하면서도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살짝 쌉싸름한 맛이 남습니다.

사삼주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향이라기보다
은은하게 다가왔다가
마신 뒤에 더덕 특유의 개성이 천천히 남습니다.

전통주 기행에서도 사삼주의 특징을
달콤한 향과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약간의 쌉싸름한 맛으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삼주는
한 모금 마시고 바로 판단하기보다는,

천천히 마셔볼수록 더 재미있는 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는 조용하지만, 나중에 기억나는 술

세상에는 첫인상이 아주 강한 술이 있습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와, 이 술 정말 세다!”

하고 바로 기억에 남는 술.

안동소주처럼 힘 있게 다가오는 술도 있고,
문배주처럼 독특한 향으로 기억되는 술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삼주는 조금 다릅니다.

처음부터 큰 목소리로
자기를 드러내는 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은은한 향이 먼저 오고,

부드럽게 넘어가고,

마지막에 더덕의 쌉싸름한 맛이 살짝 남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맛이 자꾸 생각납니다.

참 사람하고 비슷하지 않나요?

처음 만났을 때는 별다른 인상을 주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

'그때 그 사람이 참 괜찮았지.'

하고 뒤늦게 떠오르는 사람.

저는 사삼주가 조금 그런 술 같습니다.

조용하지만 오래 기억되는 술.


왜 하필 더덕이었을까요?

우리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통주를 하나씩 만날 때마다
계속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술을 빚었다는 것입니다.

제주에서는 좁쌀이 술이 되었고,

전라도에서는 배와 생강이 술에 향을 더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꽃을 넣고,
어떤 곳에서는 솔잎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낙안에서는
더덕이 술을 만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똑같은 쌀과 물을 가지고도
사람이 사는 곳에 따라 술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곳에서 자라는 곡물이 다르고,
그곳에서 나는 식물이 다르고,
무엇보다 그 술을 빚는 사람들의 손길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우리 전통주를 따라 여행하다 보면
결국 술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역의 풍경을 보고,
그곳의 음식을 만나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술 한 잔이
지역의 작은 지도처럼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술을 따라 떠난 우리나라 여행

지금까지 참 먼 길을 왔습니다.

🥃 경상북도 안동 — 안동소주
뜨거운 불을 지나 만들어지는
강렬한 증류주의 깊은 맛을 만났습니다.

🍶 충청남도 한산 — 한산소곡주
부드럽고 달콤한 맛으로
'앉은뱅이 술'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술을 만났습니다.

🍐 전라도 — 이강주
배와 생강이 만나
향기로운 술이 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제주 — 오메기술과 고소리술
섬의 좁쌀이 발효주가 되고,
다시 증류주가 되는 과정을 만났습니다.

🍶 서북 지역 — 문배주
배를 넣지 않았는데도
배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향을 가진 술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 전라남도 순천 낙안 — 사삼주

더덕 한 뿌리가
술이 된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놓고 보니
정말 재미있습니다.

같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술의 모습이 이렇게 다릅니다.


🚗 그런데 아직 만나지 못한 술이 많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주는
그저 오래된 술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곳에서 나는 재료가 있고,

그 재료를 술로 만들어온 사람이 있고,

그 술을 마셔온 사람들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를 알게 될수록
궁금한 술이 또 생깁니다.

“그럼 다른 지역에는 어떤 술이 있을까?”

찾아보니 아직도 만나지 못한 술이 참 많습니다.

이름부터 궁금한 술도 있고,

꽃을 넣어 빚는 술도 있고,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술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술 여행을
여기서 끝내기는 조금 아쉽습니다.

낙안의 돌담길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다시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겠습니다.


 다음 여행지는 충남 당진입니다

다음에 찾아갈 곳은
충청남도 당진, 면천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날 술은
이름부터 조금 낯섭니다.

면천두견주.

그런데 이 술에는
더덕 대신 아주 예쁜 재료가 들어갑니다.

바로 진달래꽃입니다.

봄이 되면 산과 들에 피어나는
그 진달래꽃이 술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지요.

낙안에서는 땅속에 숨어 있던
더덕 한 뿌리가 술이 되었는데,

다음 여행에서는
봄날 산자락에 피어난 꽃 한 줌이 술이 됩니다.

그런데 면천두견주에는
꽃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흥미로운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픈 아버지를 위해 술을 빚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술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 앞에 놓이게 된 사연도 있습니다.

과연 진달래꽃은
어떻게 술이 되었을까요?

그리고 꽃으로 빚은 술에서는
어떤 향과 맛이 날까요?

다음 여행에서는
낙안의 더덕 향을 뒤로하고,

봄꽃 향기를 따라 충남 당진 면천으로 가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진달래꽃이 술이 되는 이야기,
면천두견주
입니다. 🌸🍶

다음 잔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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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시작된 술 이야기

문배주라는 이름을 처음 들으면 이런 생각부터 듭니다.

“배로 만든 술인가?”

그런데 아닙니다.

문배주에는 우리가 흔히 먹는 배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밀과 좁쌀, 수수 같은 곡물로 술을 빚고 증류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생깁니다.

술에서 잘 익은 돌배, 그러니까 문배와 비슷한 향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도 문배주가 됐습니다.


🍐 배를 넣지 않았는데, 왜 배 향이 날까?

문배주를 마실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아니, 코에 들어오는 특징이 바로 이 향입니다.

곡물이 발효되는 동안 누룩 속 미생물이 작용하고, 그 술을 다시 증류하면서 여러 향 성분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숙성 과정까지 더해지면서 문배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향이 만들어집니다.

배를 넣어서 배 향이 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잔을 코끝에 가져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 배 같은데?”

처음 문배주를 접한 사람이라면 아마 한 번쯤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향을 한 번 맡고 그냥 마시기보다는, 잔을 살짝 돌려가며 다시 맡아보게 되는 술입니다.


평양에서 시작된 술 이야기

 문배주는 평안도 지방,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에서 전해 내려온 증류주​입니다.

예전에는 평양 대동강 유역의 물을 사용해 술을 빚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남북이 갈리고 사람들의 삶터도 달라졌습니다.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과 함께 술 빚는 기술도 남쪽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렇게 문배주도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문배주는 198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그래서 문배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야기에 닿게 됩니다.

술을 만드는 기술 하나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졌다는 것.

술 한 병을 놓고 보면 그저 전통주 한 병이지만, 그 안에 담긴 사연까지 알고 나면 잔을 대하는 마음도 조금 달라집니다.


문배주는 어떻게 만들까?

문배주의 기본적인 제조 과정은 우리가 앞서 안동에서 만났던 증류식 소주와 크게 낯설지 않습니다.

먼저 곡물과 누룩으로 술을 빚습니다.

술이 충분히 발효되면 이번에는 증류를 합니다.

열을 가하면 술 속의 알코올과 향 성분이 증기로 올라갑니다. 그 증기를 다시 식히면 맑은 증류주가 받아집니다.

그런데 같은 증류주라고 해서 맛과 향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곡물을 쓰는지, 누룩은 어떻게 만드는지, 발효와 증류를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술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문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문배주는 밀·좁쌀·수수를 원료로 하고, 누룩의 주원료 역시 밀을 사용합니다.

이런 재료와 제조법이 오랜 시간 이어지면서 문배주 특유의 향이 만들어졌습니다.


문배주는 어떤 술일까?

문배주는 첫인상이 꽤 강합니다.

증류주답게 도수가 높고 향도 또렷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독한 술’이라고만 생각하면 조금 아쉽습니다.

잔을 가까이 가져가면 먼저 특유의 향이 올라옵니다.

한 모금 마시면 곡물에서 오는 느낌이 있고, 목을 넘긴 뒤에는 따뜻한 여운이 남습니다.

저라면 문배주는 급하게 마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금씩 마시면서 향을 맡아보는 쪽이 더 잘 어울립니다.

한 모금.

잠시 두었다가 다시 한 번 향을 맡아보고.

처음에는 지나쳤던 향이 뒤늦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술도 첫인상과 두 번째 인상이 다를 때가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만난 우리 술


우리의 술 여행도 어느덧 여러 지역을 지나왔습니다.

🥃 경상북도 안동 — 안동소주
뜨거운 증류기를 거쳐 만들어지는 맑고 힘 있는 술.

🍶 충청남도 한산 — 한산소곡주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때문에 ‘앉은뱅이 술’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술.

🍐 전라도 — 이강주
배와 생강의 향이 어우러진 향긋한 전통주.

🌊 제주도 — 오메기술과 고소리술
제주의 곡물과 섬의 생활 방식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술.

🍐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지역 — 문배주
배를 넣지 않았는데도 문배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향의 술.

지역이 달라지니 술도 참 많이 달라집니다.


술을 따라 여행하다 보니

처음에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전통주를 하나씩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술을 만나고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조금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술만 남아 있는 게 아니더군요.

안동소주에는 안동에서 이어져 온 증류의 시간이 있고,

한산소곡주에는 한자리를 오래 지켜온 사람들의 손길이 있습니다.

이강주에서는 전라도의 재료와 향을 만날 수 있고,

제주의 술에서는 섬이라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문배주에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과 함께 이어져 온 술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들여다보니 전통주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술은 술인데, 그 술이 만들어진 곳의 풍경도 함께 따라옵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재료를 구할 수 있었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런 것들이 오랜 시간 술에 스며든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통주를 마실 때면 가끔 술보다 그 술이 태어난 곳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다음 여행에서는…

이제 이름난 전통주를 하나씩 찾아가는 여행에서 조금 벗어나볼까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소개하지 못한 술이 정말 많으니까요.

유명한 술 뒤편에는 그 지역에서만 조용히 이어지고 있는 막걸리도 있고, 작은 양조장에서 만들어지는 술도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조금 덜 알려졌지만 이야기가 궁금한 술들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술 한 잔 따라놓고, 그 술이 태어난 곳까지 함께 들여다보는 여행.

아직 가볼 곳이 많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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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를 처음 사러 매장에 들어가면 병부터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12 YEARS.

SINGLE MALT.

43% VOL.

CASK STRENGTH.

SHERRY OAK.

DISTILLED 2008.

영어와 숫자가 줄줄이 적혀 있으니까요.

“12는 12년 숙성이라는 뜻인가?”

“싱글 몰트면 한 통에서 나온 건가?”

“43%면 43도라는 건가?”

“CASK STRENGTH는 또 뭐지?”

처음에는 하나같이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몇 가지만 알고 나면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위스키 병에 적힌 숫자와 단어는 그저 어려운 영어가 아니라, 그 위스키가 어떤 술인지 알려주는 작은 힌트에 가깝거든요.

오늘은 위스키를 고를 때 자주 만나게 되는 표현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


1.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숫자, 12 YEARS

위스키를 보다 보면 가장 익숙한 숫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12 YEARS

말 그대로 12년입니다.

스카치 위스키에 연산이 표시되어 있다면, 이 숫자는 병 안에 들어 있는 위스키 가운데 가장 어린 원액의 숙성 기간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12년, 15년, 18년 숙성 원액을 섞었다면 병에는 12 YEARS라고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2년이라는 숫자를 보고

“이 병의 모든 위스키가 정확히 12년 숙성됐구나.”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장 어린 원액이 최소 12년 숙성됐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18년이라고 해서 반드시 12년보다 맛있는 것도 아닙니다.

위스키에서는 숙성 연수와 맛의 우열이 꼭 비례하지 않습니다.

12년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과일 향이 좋을 수도 있고, 18년의 부드럽고 깊은 풍미가 더 마음에 들 수도 있죠.

결국 취향입니다.


2. 그런데 숫자가 없는 위스키도 있다

요즘 위스키를 보다 보면 숙성 연수가 아예 적혀 있지 않은 병도 있습니다.

NO AGE STATEMENT

줄여서 NAS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숙성 연수를 숫자로 표시하지 않은 제품입니다.

그렇다고 숙성이 짧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카치 위스키는 법적으로 최소 3년 이상 숙성해야 합니다. NAS 위스키는 특정 연산을 내세우는 대신, 여러 숙성 연수의 원액을 조합해 원하는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NAS를 볼 때는

“몇 년이지?”

보다는

“이 증류소가 어떤 맛을 만들려고 했을까?”

쪽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숫자가 없다고 해서 어린 위스키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3. SINGLE MALT

위스키를 조금 알아가기 시작하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표현입니다.

SINGLE MALT

처음 보면 ‘싱글’이라는 말 때문에 한 통에서 나온 위스키인가 싶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여기서 Single은 한 캐스크가 아니라 한 증류소를 뜻합니다.

즉,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는 하나의 증류소에서 생산된 몰트 위스키입니다.

맥캘란, 글렌피딕, 글렌리벳 같은 위스키 병에

SINGLE MALT SCOTCH WHISKY

라고 적혀 있다면,

“아, 이건 한 증류소에서 만든 몰트 위스키구나.”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기억할 건 딱 하나입니다.

Single Malt = 한 통이 아니라 한 증류소.


4. BLENDED

이번에는 익숙한 표현입니다.

BLENDED SCOTCH WHISKY

블렌디드는 여러 종류의 스카치 위스키를 조합해 만든 위스키입니다.

스카치의 블렌디드 위스키에는 싱글 몰트뿐 아니라 싱글 그레인 위스키 등 여러 원액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Johnnie Walker입니다.

여기서 흔히 생기는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블렌디드는 싱글 몰트보다 아래 등급 아닌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 원액을 섞는다고 해서 단순한 술이 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원액을 조합해 원하는 맛과 균형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상당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싱글 몰트가 한 증류소의 개성을 보여준다면, 블렌디드는 여러 원액을 조합해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술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5. 40%, 43%, 46%… 이 숫자는 뭘까?

병을 보다 보면 이런 숫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40% VOL

43% VOL

46% VOL

이건 숙성 연수가 아닙니다.

알코올 도수입니다.

정확히는 ABV, Alcohol by Volume입니다.

43% VOL이라고 적혀 있다면 부피 기준 알코올 함량이 43%라는 뜻입니다.

스카치 위스키는 병입할 때 최소 40% ABV여야 합니다.

보통 40% 제품보다 46% 제품에서 알코올감과 향이 더 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숫자가 훌쩍 올라가면 이런 표현을 만나기도 합니다.

CASK STRENGTH


6. CASK STRENGTH

CASK STRENGTH

처음 보면 무슨 뜻인지 감이 잘 안 옵니다.

쉽게 말해 캐스크에서 숙성된 위스키를 높은 도수로 병입한 제품입니다.

일반적인 위스키는 병입 전에 물을 넣어 원하는 도수로 맞춥니다.

반면 캐스크 스트렝스는 캐스크에서 나온 원액의 도수를 비교적 그대로 살립니다.

그래서

CASK STRENGTH

56.3%

처럼 꽤 높은 숫자가 적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한 모금 마시면 알코올감이 상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물을 조금 떨어뜨리면 재미있는 변화가 생깁니다.

강하게 느껴지던 알코올감이 누그러지고, 처음에는 잘 느껴지지 않던 향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캐스크 스트렝스는 물을 조금씩 넣어가며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7. DISTILLED 2008

이번에는 연도가 등장합니다.

DISTILLED 2008

이건 숙성 연수가 아닙니다.

2008년에 증류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DISTILLED 2008

BOTTLED 2022

라고 적혀 있다면 2008년에 증류한 뒤 2022년에 병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계산하면 약 14년 동안 숙성한 셈이죠.

이런 표기가 있는 병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2008년이면 내가 뭘 하고 있었지?”

하고 잠깐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위스키 한 병에 숫자 하나가 더해졌을 뿐인데, 갑자기 시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8. BOTTLED

BOTTLED

말 그대로 병입 시점을 뜻합니다.

여기서 기억해둘 건 간단합니다.

증류한 날과 병에 담은 날은 다릅니다.

위스키는 증류가 끝난 뒤 바로 병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오크통에서 숙성됩니다.

그래서 위스키의 시간을 단순하게 보면

DISTILLED → MATURED → BOTTLED

이렇게 흘러갑니다.

증류소를 떠난 원액이 오크통 안에서 몇 년, 때로는 수십 년을 보내고 나서야 우리가 보는 한 병의 위스키가 되는 것이죠.


9. SHERRY CASK / SHERRY OAK

위스키 병에서 정말 자주 만나는 표현입니다.

SHERRY CASK

또는

SHERRY OAK

이런 문구가 있다면 셰리와 관련된 캐스크를 사용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셰리 캐스크에서 숙성하거나 피니시한 위스키에서는 말린 과일, 견과류, 달콤한 향신료 같은 풍미가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BOURBON CASK

EX-BOURBON

이라고 적혀 있다면 버번을 담았던 오크통을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같은 증류소에서 나온 위스키라도 어떤 캐스크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인상이 꽤 달라집니다.

그래서 위스키를 고를 때는 숙성 연수만 보지 말고 어떤 캐스크를 사용했는지도 한번 살펴보세요.

의외로 이 차이가 취향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10. FIRST FILL

가끔 이런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FIRST FILL SHERRY CASK

여기서 First Fill은 해당 캐스크가 스카치 위스키 숙성에 처음 사용되는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캐스크는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사용될 수 있고, 몇 번째 사용된 캐스크인지에 따라 오크에서 위스키로 전달되는 풍미의 정도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캐스크를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에게는 꽤 흥미로운 정보입니다.

같은 셰리 캐스크라도 First Fill인지, 여러 번 사용된 캐스크인지에 따라 위스키가 보여주는 모습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11. SMALL BATCH

SMALL BATCH

직역하면 작은 배치입니다.

말 그대로 비교적 소규모의 배치로 생산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다만 이 단어 하나만 보고

“Small Batch니까 고급 위스키겠네.”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Small Batch가 곧 최고급이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생산 방식이나 제품의 성격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보는 편이 좋습니다.


12. LIMITED EDITION

이건 조금 더 직관적입니다.

LIMITED EDITION

말 그대로 한정판입니다.

정해진 수량이나 기간 등을 기준으로 판매되는 제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위스키를 모으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한정판이 꽤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한정판이라고 해서 무조건 맛있는 건 아닙니다.

한정판의 매력은 맛뿐만 아니라 희소성이나 디자인, 출시 배경, 스토리까지 함께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13. SINGLE CASK

이건 SINGLE MALT와 헷갈리기 쉬운 표현입니다.

SINGLE CASK

말 그대로 하나의 캐스크에서 나온 위스키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Single의 의미가 다릅니다.

Single Malt = 한 증류소

Single Cask = 한 캐스크

입니다.

그래서 병에 SINGLE CASK라고 적혀 있다면 여러 캐스크의 원액을 섞은 제품과는 또 다른 개성을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싱글’이라고 다 같은 싱글이 아니라는 것, 이것만 기억해두면 됩니다.


14. BATCH NUMBER

어떤 병에는

BATCH 001

BATCH 002

처럼 숫자가 붙어 있기도 합니다.

이 숫자는 숙성 연수가 아니라 몇 번째 배치로 생산된 제품인지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병에 숫자가 있다고 무조건 숙성 연수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위스키 병의 숫자를 볼 때는 숫자 옆에 어떤 단어가 붙어 있는지를 함께 보는 습관을 들이면 좋습니다.

12 YEARS인지, DISTILLED 2008인지, BATCH 002인지에 따라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니까요.


15. 위스키 병은 이렇게 읽으면 된다

처음부터 모든 영어를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매장에서 병을 들었을 때 아래 정도만 알아도 훨씬 편해집니다.

12 YEARS
→ 숙성 연수

NAS
→ 숙성 연수를 숫자로 표시하지 않은 제품

SINGLE MALT
→ 한 증류소에서 만든 몰트 위스키

BLENDED
→ 여러 종류의 위스키를 조합한 제품

40% / 43% / 46%
→ 알코올 도수

CASK STRENGTH
→ 캐스크에 가까운 높은 도수로 병입한 제품

DISTILLED 2008
→ 2008년 증류

BOTTLED 2022
→ 2022년 병입

SHERRY CASK
→ 셰리와 관련된 캐스크를 사용한 제품

BOURBON CASK
→ 버번을 담았던 캐스크를 사용한 제품

SINGLE CASK
→ 하나의 캐스크에서 나온 위스키

LIMITED EDITION
→ 한정판

이 정도만 알아도 매장에서 위스키 병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집니다.


🥃 그런데 정말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다

위스키를 처음 고를 때 우리는 숫자에 눈이 갑니다.

12년.

18년.

21년.

25년.

숫자가 커질수록 왠지 더 좋은 술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위스키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18년보다 12년 위스키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과일 향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셰리 캐스크에서 오는 묵직하고 달콤한 풍미를 좋아할 수도 있고, 거칠게 올라오는 피트 향에 끌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좋은 위스키와 내가 좋아하는 위스키는 다를 수 있습니다.

병에 적힌 숫자와 단어는 그 위스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힌트입니다.

맛을 보증하는 성적표는 아니죠.

다음에 위스키 한 병을 집어 들었다면 숙성 연수만 보지 말고 병을 조금 천천히 읽어보세요.

몇 년인지.

어디에서 만든 건지.

어떤 캐스크를 썼는지.

도수는 얼마인지.

하나씩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아, 그래서 이 위스키가 이런 맛이겠구나.”

위스키를 마시는 재미는 어쩌면 병을 여는 순간보다 조금 먼저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 이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다음 이야기도 함께해 주세요.

구독과 공감, 


그리고 남겨주시는 댓글 한마디가
이 연재를 계속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오늘은 위스키 병에 적힌 숫자와 단어를 읽어봤다면 ,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함께 만나게 될까요?

여러분의 응원 덕분에
한 잔의 위스키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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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는 왜 오크통에서 숙성할까?

위스키를 좋아하다 보면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위스키는 왜 꼭 나무통에 넣어둘까?”

곡물을 발효시키고 증류하면 술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위스키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2년, 18년, 21년….

심지어 수십 년 동안 오크통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위스키도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나무통 안에 있어야 할까요?

재미있는 건 우리가 마시는 위스키의 색과 향, 맛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오크통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갓 만들어진 위스키는 어떤 맛일까?

증류가 끝났다고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위스키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갓 증류한 원액은 알코올 향이 강하고 꽤 거칠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익숙한 부드러운 맛이나 달콤한 풍미도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원액을 오크통에 담아 숙성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달라집니다.

오크에서 나온 성분이 술에 스며들고, 나무와 원액이 오랜 시간 만나면서 색과 향이 깊어집니다. 거칠었던 느낌도 차츰 부드러워집니다.

 

간단히 말하면,

증류 → 오크통 숙성 → 시간의 변화 → 우리가 마시는 위스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셈입니다.

 

🪵 오크통은 그냥 ‘술을 담아두는 통’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크통은 단순한 저장 용기가 아닙니다.

위스키에게는 숙성을 만들어내는 공간에 가깝습니다.

오크에는 여러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위스키가 오랜 시간 나무와 만나면서 이 성분들이 술의 향과 맛, 색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위스키를 마실 때

바닐라, 캐러멜, 코코넛, 견과류, 말린 과일, 향신료

같은 향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위스키에 바닐라나 과일을 넣은 것은 아닙니다.

나무와 술이 오랜 시간 만나면서 만들어낸 풍미입니다.


But why an orc of all things?

나무라면 소나무도 있고 밤나무도 있는데, 왜 위스키는 오크를 사용할까요?

오크는 튼튼하면서도 통으로 가공하기 좋고, 액체를 담아 숙성시키기에 적합합니다.

무엇보다 숙성 과정에서 술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성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크를 건조하고 안쪽을 불로 그을리면 나무의 성분이 열에 의해 변하면서 바닐라나 토스트, 캐러멜처럼 느껴지는 풍미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오크통은 단순히 술을 보관하는 통이 아니라,

향과 색을 더하고, 시간을 머금게 하는 공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크통 안쪽을 왜 불로 그을릴까?

오크통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차링(Charring)입니다.

통을 만들고 나면 안쪽을 불로 그을리는 과정입니다.

나무가 열을 받으면서 성분이 변화하고, 숙성되는 위스키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 과정에서 바닐라, 토스트, 구운 나무, 캐러멜 같은 풍미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위스키를 마시다 보면 나무 향 사이로 달콤한 바닐라나 구운 설탕 같은 느낌이 올라오는 것도 이런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오크통이 같은 맛을 만들까?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이 부분 때문에 위스키가 더 재미있습니다.

어떤 오크통에서 숙성했느냐에 따라 맛과 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스키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버번 캐스크(Bourbon Cask)와 셰리 캐스크(Sherry Cask)입니다.

 

🇺🇸 버번 캐스크

스카치위스키에서는 미국에서 버번을 숙성했던 오크통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런 캐스크에서 숙성한 위스키에서는

바닐라, 꿀, 코코넛, 캐러멜

같은 달콤한 풍미가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드럽고 달콤한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비교적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 셰리 캐스크

셰리 와인을 담았던 오크통은 또 다른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말린 과일, 건포도, 견과류, 초콜릿

같은 풍미가 연상되는 경우가 많고, 좀 더 진하고 풍부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맥캘란이 셰리 캐스크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맥캘란을 좋아해서인지, 셰리 오크 숙성 이야기는 저에게도 특히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같은 위스키인데 왜 색깔이 다를까?

위스키를 여러 병 놓고 보면 색이 제각각입니다.

옅은 황금색부터 짙은 호박색, 갈색에 가까운 색까지 다양합니다.

숙성 과정에서 오크가 색과 여러 성분을 술에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색이 진하다고 더 오래 숙성됐거나 더 좋은 위스키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용한 캐스크의 종류와 상태, 숙성 환경 등에 따라서도 색이 달라집니다.

그러니 짙은 색만 보고 위스키의 품질을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스키도 ‘숨’을 쉰다?

숙성 중인 오크통은 완전히 밀폐된 금속통과는 다릅니다.

창고의 온도와 습도가 계절에 따라 변하고, 그에 따라 통 안의 위스키와 오크도 계속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숙성 중에는 위스키 일부가 자연스럽게 증발합니다.

이를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마시는 대신 하늘로 날아간 위스키를 두고

‘천사들이 가져간 몫’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몇 년, 수십 년이 지나면 그 양도 꽤 많아집니다.

오래 숙성한 위스키가 귀해지는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습니다.

 


 

오래 숙성할수록 무조건 맛있을까?

여기서 흔히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30년산이 12년산보다 무조건 좋은 것 아닌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12년에는 12년만의 매력이 있고, 18년에는 18년만의 개성이 있습니다.

숙성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오크의 영향이 강해져 오히려 위스키 본래의 풍미를 가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몇 년을 숙성했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위스키를, 어떤 캐스크에서, 어떤 환경으로 숙성했느냐.

그리고 그 균형이 중요합니다.

좋은 위스키는 긴 시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오크의 균형 속에서 완성됩니다.

 

 

🥃 위스키를 고를 때 ‘캐스크’를 봐야 하는 이유

 

위스키 병을 보면 이런 표현이 적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Bourbon Cask

Sherry Cask

Oloroso Sherry Cask

Pedro Ximénez Cask

Port Cask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일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전문용어가 아니라,

“이 위스키는 어떤 통에서 시간을 보냈을까?” 를 알려주는 힌트입니다.

같은 증류소에서 만든 위스키라도 어떤 캐스크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인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스키를 비교해 마실 때는

“몇 년산이지?”

뿐만 아니라

“어떤 캐스크에서 숙성했지?”

라고 살펴보는 것도 꽤 재미있습니다.


🥃 직접 비교해 보면 더 재미있다

위스키의 차이를 느껴보고 싶다면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캐스크를 사용한 위스키를 두 잔 준비해 보세요.

한쪽은 버번 캐스크,

다른 한쪽은 셰리 캐스크.

먼저 잔을 가까이 가져가 향을 천천히 맡아봅니다.

한쪽에서는

바닐라, 꿀, 코코넛

같은 느낌이 나는지 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건포도, 말린 과일, 견과류, 초콜릿

같은 향이 느껴지는지 찾아봅니다.

정답을 맞힐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위스키의 향과 맛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지니까요.

 


🥃 오크통은 위스키에게 ‘시간’을 선물한다

생각해보면 위스키는 참 느린 술입니다.

오늘 증류했다고 내일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닙니다.

오크통에 담긴 채 몇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계절이 바뀌고, 창고 안의 시간이 쌓이는 동안 위스키는 조용히 통 안에 머뭅니다.

그 사이 오크는 색과 향을 더하고, 위스키는 나무의 성분을 천천히 받아들입니다.

처음 통에 들어갔을 때와 몇 년 뒤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숙성의 시간입니다.

 


🥃 마무리하며

위스키 한 잔에는 단순히 곡물과 물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증류소의 기술도 있고,

사용한 오크통의 이야기도 있고,

그 안에서 흘러간 시간도 있습니다.

 

버번 캐스크에서는 바닐라와 꿀 같은 달콤한 풍미가,

셰리 캐스크에서는 말린 과일과 견과류 같은 깊은 풍미가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오크통이 있습니다.

 

사실 제가 맥캘란을 좋아하게 된 것도 이런 맛 때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위스키를 찾아 마셨던 건 아니에요.

남편 따라 한 잔씩 마시다 알게 된 위스키가 맥캘란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한두 모금 맛보는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잔에 담긴 향을 먼저 맡아보고, 한 모금 마신 뒤 어떤 맛이 느껴지는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특히 맥캘란에서 느껴지는 말린 과일의 달콤함과 은은한 스파이스, 오크에서 오는 깊고 부드러운 풍미가 제 입맛에는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한 잔씩 마시다 보니

위스키가 조금씩 궁금해졌습니다.

“이 맛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 궁금증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오크통까지 오게 됐네요.

 

다음에 위스키 한 병을 집어 들었을 때 병 앞면의 숫자만 보지 말고,

“이 위스키는 어떤 통에서 시간을 보냈을까?”

한번 살펴보세요.

 

그러면 위스키 한 잔이 단순한 술이 아니라,

몇 년 동안 오크통 안에서 기다려온 하나의 이야기

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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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바람입니다.

돌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바다에서는 짭조름한 냄새가 올라옵니다.

그런 제주를 돌아다니다 보면 육지에서는 쉽게 만나기 어려운 술 이야기도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입니다.

하나는 발효해서 만든 술이고,

다른 하나는 그 술을 다시 증류해서 만든 술입니다.

그런데 이름부터 조금 낯설죠.

오메기술? 고소리술?

도대체 어떤 술일까요?


 제주에서는 쌀 대신 무엇으로 술을 빚었을까요?

제주는 예부터 논농사를 짓기에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쌀만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 차조와 보리 같은 곡물을 가까이 두고 살아왔습니다.

술을 빚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주 전통주를 이야기할 때 차조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오메기떡이 등장합니다.

오메기술은 전통 방식으로 만든 오메기떡과 누룩을 이용해 발효시켜 빚는 술입니다. 제주에서는 오메기술을 빚기 위한 떡을 만들고, 이를 누룩과 함께 발효시키는 방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니까 오메기술을 제대로 알려면 술병부터 볼 게 아니라,

먼저 오메기떡을 봐야 하는 셈입니다.

떡을 만들고,

누룩을 넣고,

발효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떡이 술이 됩니다.

참 제주다운 시작입니다.


오메기술, 제주에서 마시던 술

오메기술을 잔에 따라보면 막걸리와 비슷한 느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모금 마셔보면 조금 다릅니다.

차조에서 오는 고소한 맛이 있고,

발효주 특유의 부드러운 느낌도 있습니다.

화려한 향으로 먼저 다가오는 술이라기보다,

음식과 함께 천천히 마시기 좋은 술에 가깝습니다.

예전 제주 사람들에게 오메기술은 특별한 날에만 꺼내는 술이라기보다 생활 가까이에 있던 술이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한 잔 내놓고,

집안에 일이 있으면 술을 빚고,

필요한 만큼 만들어 마셨겠죠.

제주에서 오메기술을 만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전 제주 사람들은 이 술을 어떤 자리에서 마셨을까?”

지금처럼 편의점에 가서 술 한 병을 사 오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술을 마신다는 건 곧 술을 빚는 일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술을 다시 증류한다고요?

여기서 이야기가 한 단계 더 재미있어집니다.

오메기술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제주 사람들은 발효한 술을 다시 증류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술이 바로 고소리술입니다.

고소리는 제주에서 소줏고리, 즉 술을 증류할 때 사용하는 전통 증류 기구를 부르는 말입니다. 오메기술을 고소리에 넣고 증류하면 술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이 술을 모아 숙성한 것이 고소리술입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과정입니다.

오메기술을 만들고,

그 술을 고소리에 넣고,

불을 지핍니다.

그러면 술에서 증기가 올라오고,

그 증기가 식으면서 다시 액체가 됩니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그렇게 받아낸 술이 고소리술입니다.

이 과정을 알고 나면 고소리술이라는 이름도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술 이름에 아예 술을 만드는 도구의 이름이 들어가 있으니까요.


안동소주와 고소리술은 무엇이 다를까요?

앞에서 안동에서도 증류주를 만났습니다.

안동소주 역시 발효한 술을 증류해서 만듭니다.

제주 고소리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출발점이 다릅니다.

안동에서는 곡물을 발효해 술을 빚고 증류했다면,

제주에서는 차조로 만든 오메기술을 다시 증류합니다.

그래서 같은 증류주인데도 향과 맛의 인상이 달라집니다.

안동소주를 마셨을 때는 맑고 강한 알코올감과 곡물 향이 먼저 다가왔다면,

고소리술에서는 제주 곡물로 빚은 술의 고소한 느낌과 증류주 특유의 또렷한 향이 느껴집니다.

같은 증류 방식이라도,

어떤 술을 증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거죠.


🍶 오메기술에서 고소리술까지

제주의 술을 한 줄로 정리하면 꽤 재미있습니다.

차조 → 오메기떡 → 발효 → 오메기술 → 증류 → 고소리술

발효주 하나가 다시 증류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을 따로 떼어놓고 보기보다,

하나의 술 문화 안에서 이어지는 두 단계로 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실제로 제주 전통 방식에서는 오메기술을 고소리에 넣어 증류하는 과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주 술에는 제주가 들어 있습니다

안동에서는 쌀과 곡물을 발효하고 증류하는 기술을 만났습니다.

한산에서는 찹쌀로 빚은 달콤한 소곡주를 만났고,

전주에서는 배와 생강, 계피 같은 재료가 술에 향을 더하는 이강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제주에서는 차조가 술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제주에 쌀이 풍족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오메기술도 다른 모습이었을까요?

술은 결국 그곳에서 사람들이 구할 수 있었던 재료와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음식과 생활도 만나게 됩니다.

제주의 오메기술과 고소리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 많은 섬에서 구할 수 있었던 곡물과, 그 곡물로 살아온 사람들의 생활이 술 속에 남아 있습니다.


 술을 따라 떠난 우리나라 여행

지금까지 꽤 먼 길을 왔습니다.

🥃 경상북도 안동
발효한 술을 증류해 만든 안동소주

🍶 충청남도 한산
부드럽고 달콤한 맛으로 유명한 한산소곡주

🍐 전라북도 전주
배와 생강, 계피 등의 향을 담은 이강주

🌊 제주도
차조로 빚은 발효주 오메기술
그리고 그것을 다시 증류한 고소리술

이렇게 놓고 보니 정말 재미있습니다.

우리나라 술에는 정답이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발효가 중심이 되고,

어떤 지역에서는 증류가 중심이 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가 술의 개성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전통주’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이렇게 서로 다른 술이 태어났겠죠.


🚗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안동에서 시작해 한산을 지나 전주까지 내려왔고,

이번에는 바다를 건너 제주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아직 만나보지 못한 술이 많습니다.

이름부터 신기한 술도 있고,

한 지역에서만 오랫동안 이어져 온 술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다시 육지로 돌아가볼까요?

이번에 찾아갈 술은 이름부터 궁금증을 만들어냅니다.

문배주.

그런데 문배주에는 문배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술에서는 은은한 배 향이 난다고 합니다.

배를 넣지 않았는데 어떻게 배 향이 나는 걸까요?

다음 여행에서는 이 신기한 향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 다음 이야기

「배를 넣지 않았는데 배 향이 난다? 문배주에 담긴 신기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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