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프랑스에서 맞이한 주말 아침.

평일이면 출근 준비로 늘 바쁘게 움직이던 딸아이가 오늘은 조금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가방을 챙기더니 웃으며 말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알비 가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파리처럼 익숙한 도시도 아니고,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관광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딸아이는 툴루즈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곳이라며 꼭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아침 일찍 툴루즈 역으로 향했다.

주말 아침의 역은 평일과 조금 달랐다.
빠르게 지나가는 출근길 발걸음 대신 여행 가방을 든 사람들의 느긋한 표정들이 보였다.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시를 벗어나자 창밖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초원.
작은 포도밭들.
구름처럼 하얗게 흩어진 양 떼들.

창밖 풍경이 너무 평화로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프랑스라는 이름이 왜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한 시간 남짓 흘렀을까.

기차는 작은 역 앞에 멈춰 섰다.

 

알비였다.

역을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붉은 벽돌이었다.

붉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드러웠다.
햇살을 받은 벽돌들은 핑크빛 같기도 하고, 어떤 곳은 오렌지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시 전체가 따뜻한 색을 입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골목 끝에서 거대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성당이라기보다 오래된 성벽 같았다.

높고 단단한 벽.

화려하게 꾸며진 유럽 성당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남편과 나도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저게 성당이야?"

우리가 바라보고 있던 건 바로 Albi Cathedral 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성당보다는 거대한 요새처럼 느껴졌다.

알비는 중세 시대 종교 갈등의 중심에 있었던 도시라고 한다.

당시 가톨릭과 카타리파 사이의 오랜 전쟁이 이어졌고, 전쟁이 끝난 뒤 교회는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듯 거대한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곳은 아름다움보다 먼저 단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높은 천장.
화려한 조각들.
짙은 색으로 채워진 벽과 그림들.

밖이 힘으로 세운 공간이었다면 안은 아름다움으로 채운 공간 같았다.

마침 우리가 방문한 날에는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조용히 울려 퍼지는 성가 소리가 성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관광객들조차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도 괜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성당을 나와 바로 옆 주교궁 쪽으로 향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곳에는 이 도시가 낳은 가장 유명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Henri de Toulouse-Lautrec.

학창 시절 미술책에서 한 번쯤 봤던 이름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친 뒤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던 화가.

그래서였을까.

그는 화려한 사람들보다 무대 뒤 사람들의 모습을 더 많이 그렸다.

파리의 밤거리와 무희들, 술집 사람들.

그의 그림 속에는 이상하게도 화려함보다 쓸쓸함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림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어쩌면 가장 아픈 곳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건 아닐까.

 

박물관을 나와 다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알비의 골목은 참 재미있었다.

붉은 벽돌 건물 사이사이 작은 상점들이 숨어 있었고, 예쁜 간판 아래 오래된 식당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몇 군데는 자리가 없었고, 몇 군데는 예약 손님만 받고 있었다.

배는 점점 고파지는데 마음에 드는 곳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몇 개의 골목을 돌았는지 모를 정도로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작은 식당 하나를 발견했다.

장바구니를 옆에 둔 단골손님들이 식사하고 있었고, 주인장은 손님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괜히 믿음이 갔다.

이런 곳은 실패한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주인장이 추천해준 음식과 와인을 주문했다.

와인 첫 잔이 바닥을 보일 즈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이 나왔다.

말해 뭐 하나.

너무 맛있었다.

무슨 이름의 음식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식당 안 분위기와 음식 냄새, 주인장의 웃음은 아직도 또렷하다.

식사를 마친 뒤에도 우리는 알비 구석구석을 천천히 걸었다.

 

골목 끝에서는 오래된 다리가 나타났고, 어느 길에서는 타른강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햇살 아래 앉아 쉬고 있었고, 강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알비는 참 신기한 도시였다.

유명한 관광지를 따라다니며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곳.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이어지는 곳.

그날 우리가 알비에서 가져온 건 멋진 성당 사진도, 유명한 그림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가장 오래 남은 건 딸과 함께 기차를 타고 떠났던 주말 아침과, 목적 없이 걸었던 그 느린 시간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