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폴리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
전날은 밤늦게 도착해서 숙소 근처에서 피자를 먹고 하루를 마무리했기 때문에, 이날부터 본격적으로 나폴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 일정은 대부분 딸아이가 짰다.
어디를 갈지, 어떤 교통편을 이용할지 미리 찾아보고 우리는 딸아이를 따라다니는 식이었다.
덕분에 나는 지도를 열어볼 일이 별로 없었다.
그냥 "여기 가자" 하면 따라가고, "이쪽으로 가자" 하면 또 따라가고. ㅎㅎ

아침부터 에스프레소를 잘못 마셨다
아침에는 숙소인 B&B Mergellina에서 간단하게 먹을 것을 준비해 주었다.
빵도 있고 주스와 우유도 있었고 커피 머신도 있었다.
그런데 굳이 밖으로 나갔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현지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셔보고 싶었다.
숙소 근처 작은 카페에 들어가 평소 영국 집에서 마시던 커피를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더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잠시 후 나온 커피를 보니 잔이 정말 작았다.
"이게 더블이라고?"
싶었는데 색은 꽤 진했다.
그래도 커피니까 괜찮겠지 하고 마셨는데...
그날 오전 내내 속이 쓰렸다. ㅎㅎ
평소에도 커피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탈리아에서 마신 진한 에스프레소는 생각보다 나에게 강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데, 나폴리 둘째 날의 첫 기억이 관광지가 아니라 더블 에스프레소와 속 쓰림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에스프레소가 워낙 일상적인 음료라 작은 잔에 진하게 마시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처럼 평소 연한 커피에 익숙하다면 처음에는 한 잔만 주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는 하필 더블이었다.
나폴리 골목길을 걷다
둘째 날의 첫 일정은 특별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냥 걸었다.
나폴리는 유명한 관광지만 찾아다니는 것보다 골목을 직접 걸어보는 재미가 있는 도시였다.
오래된 건물 사이로 좁은 골목이 이어지고, 창문과 발코니에는 빨래가 걸려 있었다.
작은 가게 앞에서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오토바이는 좁은 골목도 익숙하다는 듯 지나갔다.
전날 밤에는 캐리어를 끌고 숙소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낮에 다시 걸어보니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첫날에는 힘들었던 그 골목들이 이상하게 정겹게 느껴졌다.
나폴리 여행을 한다면 유명 관광지를 지도에 찍어놓고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하루 중 한두 시간 정도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골목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관광객이 많은 곳에서는 가방이나 휴대전화 같은 소지품은 잘 챙겨야 한다.




스페인 지구에서 만난 마라도나

우리가 걸어간 곳 가운데 기억에 남는 곳은 스페인 지구(Quartieri Spagnoli)였다.
좁은 골목이 이어지고 작은 집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창문 사이로 빨래가 걸려 있고, 골목에는 오토바이가 다닌다.
그런데 이곳에서 유난히 많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마라도나였다.
벽에도 마라도나.
골목에도 마라도나.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도 "나폴리 사람들에게 마라도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싶을 정도였다.
특히 라르고 마라도나(Largo Maradona) 주변에는 마라도나를 기리는 벽화와 장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딸아이는 마라도나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해주었고 나는 옆에서 벽화를 구경했다.
축구를 잘 몰라도 이곳을 걷다 보면 마라도나가 나폴리라는 도시에서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스페인 지구를 지나 플레비시토 광장으로
스페인 지구의 좁은 골목을 걷다가 큰길 쪽으로 나오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조금 더 걸어가자 플레비시토 광장(Piazza del Plebiscito)이 나왔다.
좁은 골목 사이를 걷다가 갑자기 이렇게 넓은 광장이 나타나니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광장 한쪽에는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di Paola)이 있고 맞은편에는 나폴리 왕궁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의 둥근 돔과 양쪽으로 이어지는 회랑이 광장을 감싸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 주변에는 나폴리 왕궁, 산 카를로 극장, 옴베르토 1세 갤러리가 가까이 모여 있어서 나폴리 여행 코스를 짤 때 함께 둘러보기 좋다.
우리도 처음부터 아주 치밀하게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를 보고 나오면 다음 장소가 가까이 있고, 또 조금 걷다 보면 다음 장소가 나오는 식이었다.



나폴리 왕궁에서 만난 뜻밖의 풍경

플레비시토 광장 바로 옆에는 나폴리 왕궁(Palazzo Reale di Napoli)이 있다.
왕궁이라고 하면 화려한 방이나 오래된 가구 같은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내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는 것은 조금 의외의 장소다.
바로 오래된 창문 하나였다.
왕궁 안의 회랑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특별히 어떤 곳을 찾아가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가 커다란 창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창밖을 보는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창문 너머로 나폴리 항구가 보였다.
푸른 바다 위에는 배들이 떠 있었고, 멀리 베수비오산까지 보였다.
오래된 창틀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바다, 항구의 모습이 참 좋았다.
한참을 보고 있다가 딸아이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했다.
그때는 그냥 풍경이 좋아서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와서 사진을 다시 보니, 이상하게 그때 그 창가에 서 있던 순간이 자꾸 생각난다.
아마 나폴리 왕궁에서 무엇을 봤느냐고 물으면 나는 이 창문 이야기를 먼저 할 것 같다.
화려한 왕실의 방보다, 회랑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이 풍경이 내게는 더 오래 남았다.
나폴리 여행에서 이런 순간이 좋다.
일부러 찾아간 곳이 아니라 걷다가 우연히 만난 풍경 하나가 여행이 끝난 뒤까지 남아 있는 것.
그날의 사진을 다시 볼 때마다 그 창문 앞에 서 있던 내가 생각난다.
나폴리 왕궁 여행 정보
나폴리 왕궁은 플레비시토 광장 바로 옆에 있어서 함께 둘러보기 좋다.
왕궁 내부에는 왕실의 역사와 관련된 공간들이 있으며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방문할 계획이라면 운영시간과 휴관일, 입장료를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특별 관람이나 일부 공간은 별도 예약이 필요한 경우도 있으니 방문 전 공식 안내를 확인하는 것을 추천한다.
옴베르토 1세 갤러리


왕궁을 나온 뒤에는 옴베르토 1세 갤러리(Galleria Umberto I)로 걸어갔다.
나폴리 여행 사진에서 한 번쯤 봤던 장소였다.
밖에서 보면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높은 유리 지붕과 돔이 눈에 들어왔다.
네 방향으로 통로가 뻗어 있는 구조이고 가운데 바닥에는 커다란 대리석 모자이크가 있다.
천장도 예쁘지만 바닥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우리도 몇 장 찍었다.
걷다가 잠시 쉬어가기에도 괜찮은 장소였다.
무엇보다 플레비시토 광장과 나폴리 왕궁, 산 카를로 극장 등이 가까이 있어서 여행 동선을 짜기도 편하다.
점심은 또 나폴리 피자

옴베르토 1세 갤러리를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푸니쿨라를 타러 가기 전에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딸아이가 말했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이탈리아 피자는 다 먹어보자."
첫날 밤에도 나폴리 피자를 먹었는데 또 피자였다.
결국 우리는 근처 트라토리아 피제리아에 들어갔다.
딸아이는 피자를 주문하고 나와 남편은 파스타를 골랐다.
여기에 가지 요리도 하나 추가했다.
음식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니 테이블이 금세 꽉 찼다.
피자에 파스타, 가지 요리까지 먹고 나니 배가 정말 불렀다.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가면 관광도 하지만 먹는 데도 꽤 진심이다.
첫날 저녁 피자와 티라미수.
둘째 날 점심 또 피자와 파스타.
그래도 같은 나폴리 피자라도 가게마다 도우의 식감이나 토마토소스 맛이 조금씩 달랐다.
첫날 먹었던 피자와 비교하면서 먹으니 그것도 재미있었다.
푸니쿨라를 타고 산텔모성으로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푸니쿨라를 타러 갔다.
나폴리는 바다와 언덕이 가까이 붙어 있는 도시라 평지를 걷다가 어느 순간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때 이용하기 좋은 교통수단이 푸니쿨라(Funicolare)다.
현재 나폴리에는 중앙(Centrale), 키아이아(Chiaia), 몬테산토(Montesanto), 메르젤리나(Mergellina) 네 개의 푸니쿨라 노선이 운행되고 있다.
우리가 이날 향한 곳은 산텔모성(Castel Sant'Elmo)이 있는 보메로 언덕이었다.
푸니쿨라는 관광객을 위해 만들어진 교통수단이 아니라 지금도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실제 대중교통이다.
직접 타보니 생각보다 짧았다.
기차처럼 한참 올라가는 것은 아니고 잠깐 이동하는 느낌인데, 평지에서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느껴졌다.
그런데 푸니쿨라를 타니 이 노래가 생각났다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면서 문득 익숙한 노래가 떠올랐다.
"푸니쿨리 푸니쿨라~"
어릴 때부터 한 번쯤 들었던 나폴리 노래..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노래는 우리가 이날 타고 있던 나폴리 푸니쿨라를 직접 노래한 것은 아니었다.
1880년 베수비오산에 처음 만들어진 베수비오 푸니쿨라의 개통을 기념해 만들어진 나폴리 노래라고 한다.
그러니까 폼페이의 푸니쿨라 이야기도 아니고, 현재 나폴리에서 운행하는 푸니쿨라를 노래한 것도 아니다.
당시 베수비오산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홍보 성격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푸니쿨라는 사라졌다.
하지만 나폴리에서 실제 푸니쿨라를 타고 있으니 그 유명한 노래가 괜히 더 실감 나게 느껴졌다.
https://youtu.be/Uk4j6cGSdZQ?si=oz8MvaE_6ywj1shr
산텔모성에서 내려다본 나폴리



푸니쿨라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산텔모성 쪽에 도착했다.
아래에서 보던 나폴리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항구와 해안선도 길게 이어졌다.
아침에 걸었던 구시가도 저 아래 어딘가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좁은 골목에서 사람과 오토바이를 피해가며 걷고 있었는데 높은 곳에 올라오니 그 복잡했던 도시가 하나의 풍경처럼 보였다.
나폴리가 왜 언덕의 도시인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우리가 걸었던 거리와 바다, 건물들이 높낮이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한참을 내려다봤다.
하루 종일 많이 걸어서 다리는 아팠지만 이 풍경을 보고 있으니 잠시 피곤한 것도 잊었다.


산텔모성 여행 정보
산텔모성(Castel Sant'Elmo)은 나폴리 보메로 언덕 위에 있는 별 모양의 요새다.
현재는 성 자체와 함께 Museo Novecento a Napoli가 운영되고 있다.
산텔모성을 찾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폴리 시내와 나폴리만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이다.
특히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다와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전망을 좋아한다면 여행 일정에 넣어볼 만하다.
방문 시간과 입장료는 변경될 수 있으므로 여행 전에 공식 안내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나폴리 여행 둘째 날을 마치며
둘째 날은 꽤 많이 걸었다.
아침에는 숙소에서 나와 에스프레소를 마셨다가 속을 달래고, 나폴리 골목을 지나 스페인 지구까지 걸었다.
마라도나의 흔적도 만나고 플레비시토 광장도 보고 나폴리 왕궁에도 들어갔다.
그리고 왕궁 안에서 우연히 만난 오래된 창문.
그 창문 너머로 보이던 나폴리 항구와 베수비오산은 지금도 사진을 보면 그날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후에는 옴베르토 1세 갤러리를 지나 점심을 먹고, 또 피자를 먹었다. ㅎㅎ
그리고 푸니쿨라를 타고 산텔모성으로 올라갔다.
아래에서 걸었던 나폴리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나폴리는 참 달랐다.
첫날이 나폴리에 도착해서 도시의 분위기를 익히는 날이었다면, 둘째 날부터는 조금씩 나폴리 안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골목을 걸어보고, 현지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도 마셔보고, 피자도 먹고, 푸니쿨라도 타봤다.
여행을 준비할 때 사진으로 보았던 나폴리와 직접 걸어본 나폴리는 역시 달랐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유명한 관광지보다 골목에서 본 빨래와 스쿠터, 너무 진했던 에스프레소, 점심으로 또 먹었던 피자, 그리고 왕궁의 오래된 창문 같은 것들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마 여행이라는 게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기억하려고 했던 장면보다, 별생각 없이 지나갔던 순간이 나중에 더 오래 남는 것.
나폴리 둘째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나폴리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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