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안의 돌담길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다시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전라남도 순천에서 충청남도 당진까지.
지역은 달라졌지만 이번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곳에서 오래도록 이어져 온 술 한 잔입니다.
당진에서도 조금 더 들어가 면천에 도착합니다.
옛 읍성이 남아 있고, 마을 곳곳에 오래된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 봄이면 산과 들에 진달래가 피어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만날 술은 이름부터 조금 낯섭니다.
면천두견주(沔川杜鵑酒).
두견주라니.
무슨 새 이름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아주 예쁜 뜻을 품고 있습니다.
진달래꽃을 두견화라고도 부르기 때문입니다.
진달래꽃을 넣어 빚는 술을 두견주라고 부릅니다.
이번에는 더덕 한 뿌리가 아니라,
봄꽃 한 줌이 술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 술에 꽃을 넣는다고요?

술을 따라 여행하다 보면 가끔 우리 조상들은 참 다양한 재료를 술에 넣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쌀로 술을 빚는 것은 익숙하지만, 이번에는 꽃입니다.
그것도 봄이면 산과 들에서 흔히 만나는 분홍빛 진달래꽃.
면천두견주의 재료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찹쌀, 누룩, 물, 그리고 진달래꽃.
하지만 재료가 단순하다고 술을 만드는 과정까지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먼저 찹쌀로 고두밥을 만들고 누룩과 물을 섞어 밑술을 만듭니다.
발효가 진행된 밑술에 다시 찹쌀과 누룩, 물을 넣고 덧술을 합니다. 여기에 진달래꽃잎이 들어갑니다.
면천두견주는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빚는 이양주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쌀을 준비하고, 누룩을 만들고, 밑술을 빚고, 다시 덧술을 하고, 꽃을 넣고.
그리고 기다립니다.
술 한 잔을 마시기까지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진달래가 피는 계절을 기다립니다

면천두견주에서 진달래꽃은 아무 때나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닙니다.
진달래가 피는 4월, 꽃이 피어 있는 동안 꽃잎을 채취해 일 년 동안 사용할 양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계절과 상관없이 웬만한 식재료를 구할 수 있지만, 옛날 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꽃이 피어야 술을 빚을 수 있고, 곡식이 익어야 술을 빚을 수 있고, 좋은 물이 있어야 술을 빚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통주는 계절을 따라가는 술이기도 합니다.
봄이 오면 꽃을 준비하고, 쌀과 술독을 준비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봄을 한 잔의 술로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술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면천두견주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복지겸과 그의 딸 이야기입니다.
복지겸은 고려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게 됩니다. 좋다는 약을 써도 좀처럼 낫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딸은 아버지의 병이 낫기를 바라며 아미산에 올라가 100일 동안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밤, 꿈에 신선이 나타났습니다.
아미산에 피어 있는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되 면천의 ‘안샘’ 물을 사용하고, 술이 익은 뒤에는 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들이라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딸은 꿈에서 들은 대로 했고, 그렇게 만든 술을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물론 오늘날 의학적으로 증명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면천두견주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야기가 좋습니다.
이 술의 시작을 ‘누군가 술을 발명했다’는 이야기보다 아버지를 걱정하는 딸의 마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술을 빚는 데에는 쌀과 누룩과 물이 필요했겠지만, 그 시작에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는 이야기니까요.
술에는 마음도 들어가는 걸까요?

술 이야기를 따라다니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술에는 정말 재료만 들어가는 걸까.
쌀이 들어가고, 누룩이 들어가고, 물이 들어가고, 꽃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 술을 빚으면서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누군가는 가족을 생각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손님을 생각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좋은 날을 기다렸을 겁니다.
면천두견주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전해지는 설화 속에서 딸은 아버지를 위해 술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이 술을 마실 때면 진달래 향만 생각하기보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빚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술 한 잔에 이야기가 더해지는 순간입니다.
100일을 기다리는 술

면천두견주 이야기에서 눈에 들어오는 숫자가 하나 있습니다.
100일.
설화 속에서 딸은 100일 동안 정성을 다해 기도합니다.
술을 빚는 일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쌀을 씻었다고 오늘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발효를 기다리고, 숙성을 기다리고, 술이 자기 맛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요즘에는 무엇이든 빨리 얻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주문하면 다음 날 도착하고, 음식을 주문하면 금방 나오고, 보고 싶은 것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술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전통주를 들여다보다 보면 술을 만드는 법만큼이나 기다리는 시간을 생각하게 됩니다.
잔을 들어보면 진달래 향이 납니다
면천두견주는 진달래꽃 때문에 담황색을 띠며 은은한 진달래 향이 특징으로 소개됩니다.
꽃으로 술을 만든다고 해서 진달래 향이 아주 강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은은합니다.
잔을 가까이 가져가면 살짝 꽃 향이 느껴지고, 한 모금 마시면 찹쌀에서 오는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은은한 향이 남습니다.
그래서인지 면천두견주는 이름을 알고 마시는 것과 모르고 마시는 것이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모르고 마시면
“향이 참 부드럽네.”
하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이 술에 진달래꽃이 들어갔대.”
이 말을 알고 마시면 잔 속에 봄이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술도 한때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전통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비슷한 장면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오래된 술이라고 해서 저절로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면천두견주도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198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될 당시 보유자가 인정되었지만, 2001년 보유자가 세상을 떠난 뒤 후속 전승자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2004년 지역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면천두견주보존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에는 지역 주민으로 구성된 보존회가 국가무형문화재 보유단체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면천두견주가 한 사람만의 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전통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을 때, 결국 그것을 이어받은 것은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전통주는 때로 한 집안의 술이지만, 때로는 마을 전체의 술이기도 합니다.
면천두견주가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봄이면 면천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이 이야기를 알고 나면 면천이라는 동네도 조금 다르게 보일 것 같습니다.
봄날 면천을 찾아가 진달래가 피어 있는 길을 걷고, 오래된 면천읍성을 둘러보고, 마을 풍경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에는 두견주 한 잔.
그러면 술잔을 들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꽃이 술이 되었구나.”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을 진달래가 그날만큼은 조금 특별해 보일 것 같습니다.
꽃은 피었다가 지지만, 그 꽃을 술에 담아두면 조금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으니까요.
술을 따라 떠나면, 계절도 따라옵니다
안동에서는 뜨거운 불을 만났습니다.
한산에서는 찹쌀의 달콤함을 만났고,
전주에서는 배와 생강의 향을 만났습니다.
제주에서는 차조가 오메기술이 되고 다시 고소리술이 되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문배주에서는 술에 들어가지 않은 배의 향을 만났고,
낙안에서는 더덕 한 뿌리가 술이 되는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진달래꽃입니다.
우리나라의 술은 참 많은 것을 품고 있습니다.
지역의 곡식도 품고, 산에서 나는 식물도 품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한 계절까지 술잔에 담아냅니다.
면천두견주는 그런 술인 것 같습니다.
봄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술.
다음에는 어디로 가볼까요?
술을 하나씩 찾아다니다 보니 욕심이 생깁니다.
“우리나라에 또 어떤 술이 있을까?”
찾아보면 정말 많습니다.
꽃으로 빚는 술도 있고, 대나무에서 얻은 재료로 만드는 술도 있고, 백 일을 기다려야 하는 술도 있습니다.
한 집안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술도 있고, 한때 사라질 뻔했다가 다시 사람들의 손으로 살아난 술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봄꽃을 따라 충남 당진 면천까지 왔습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술을 찾아 어떤 길을 걷게 될까요.
술 한 잔에 담긴 것은 술만이 아니니까요.
그곳의 풍경이 있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이 있고,
그 술을 지켜온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잔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다음 여행에서 다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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