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회색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유리창 위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가느다란 빗줄기가 골목을 촘촘히 적셔 갔다. 젖은 돌바닥은 한층 더 짙은 색으로 반짝였고, 창가 아래로는 우산을 펼친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햇살 가득한 세비야의 하루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비 앞에서 우리는 잠시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래도 그대로 숙소에 머물기엔 아쉬웠다. 우의를 챙겨 입고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전날 찾아 두었던 장소를 하나 들러 보기로 했지만, 막상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길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비를 피해 좁은 골목을 돌고 또 돌다 보니 어느새 어디쯤 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목적지는 결국 찾았지만 꼭 지금 와야 했나 싶은 생각이 스쳤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시간은 애매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소한 짜증이 조금씩 표정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일정을 멈춘 채 다음 목적지를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정오가 지나 있었고, 다행히 빗줄기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시 정리한 뒤, 우리는 천천히 길을 나섰다.

 

미로처럼 이어진 구시가지 골목을 걷다 보니 좁은 건물 틈 사이로 낯익은 곡선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버섯처럼 솟아오른 거대한 구조물.

 

세타스 데 세비야였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자 나뭇결이 살아 있는 거대한 지붕이 광장 위를 넓게 덮고 있었다. 비가 갠 뒤 흐릿한 햇살은 그 사이를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계단에 앉아 쉬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고, 아래층 시장에서는 커피 향과 기타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그 순간부터 아침 내내 엉켜 있던 마음도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시간 위에 새로 만들어진 광장

 

원래 이곳에는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며 시장은 점차 기능을 잃었고, 세비야시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국제 공모를 통해 지금의 모습이 탄생했고, 현재는 세계 최대 규모의 목조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단순한 전망 공간이 아니었다. 지하에는 로마와 이슬람 시대 유적이 남아 있고, 시장과 상점, 광장과 전망대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과거와 현재, 일상과 여행이 한 곳에서 만나는 장소.

 

전망 데크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침에 길을 잃고 투덜거리던 일이 마치 다른 도시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세비야 여행 동안 우리는 이곳을 두 번 찾았다.

 

광장은 여전히 활기찼고, 멀리서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대로변 계단 아래 한 청년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맑게 갠 세비야 하늘 아래 그의 목소리는 공기 속으로 가볍게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하나둘 걸음을 멈췄고, 노래가 끝나자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졌다. 청년은 수줍게 웃었다.

 

광장 전체가 하나의 악기처럼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도 그 소리에 이끌리듯 광장을 천천히 한 바퀴 더 걸었다.

 

스페인 광장에서 만난 플라멩코

 

파라솔 광장을 뒤로하고 우리는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조금씩 세비야 골목길에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무 골목이나 자연스럽게 들어설 만큼 말이다. 골목마다 플라멩코 의상이 걸린 상점을 지나고, 이름 모를 작은 성당이 눈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곤 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스페인 광장에 도착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마차 바퀴 소리가 달그락거리며 지나가고, 멀리서 피리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광장 한쪽에서는 이미 플라멩코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파란 드레스를 입은 댄서가 몸을 흔들며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발끝이 나무판을 두드릴 때마다 단단한 박자가 울려 퍼졌고, 기타와 노래, 손뼉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잠시 후 파란 드레스의 댄서가 물러나고 빨간 드레스를 입은 댄서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빨간 드레스 자락은 물결처럼 흔들렸고, 발소리와 기타, 노래는 또 다른 에너지를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춤과 음악, 손뼉 소리, 그리고 관객들의 숨소리까지 모두 하나로 섞여 있었다.

 

그날 세비야에서 본 수많은 풍경 가운데 유독 이 장면이 오래 남은 이유는 아마 그 순간 여행의 리듬이 비로소 도시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광장을 천천히 뒤로했다.

 

아침에는 비 때문에 길을 잃고 서로 투덜거리던 하루였는데, 돌아보니 결국 세비야는 풍경보다 먼저 소리로 기억되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에도 플라멩코의 박자와 거리의 노랫소리는 오래도록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의 세비야는 오래도록 귀 안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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