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어왕의 집(Casa del Rey Moro)을 나와 다시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집들의 낡은 벽과 빛바랜 목재 창틀이 눈에 들어왔다.
문 앞에 걸린 작은 간판, 오래된 노포의 문고리와 녹슨 쇠창살까지.
세월이 골목 깊숙이 퇴적된 채 남아 있는 듯했다.
우리는 말없이 그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론다 골목에서 만난 플라멩코의 흔적

골목 벽 한편에는 플라멩코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비에 젖은 종이조차 이질감 없이 풍경 속에 녹아들어 있어, 잠시 그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론다는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오래된 벽과 골목 사이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건네는 도시처럼 느껴졌다.
무라야스 델 카르멘 성벽(Murallas del Carmen)

골목을 따라 내리막길을 걷다 보니, 절벽 위로 이어진 무라야스 델 카르멘(Murallas del Carmen)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슬림 시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이 성벽은, 오랜 세월의 비와 바람을 견디고도 놀라울 만큼 단단한 모습이었다.
젖은 돌벽 틈으로 빗물이 천천히 흘러내렸고, 오래된 돌의 질감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살아났다.
성벽 위에 서자 론다 너머의 풍경이 조용히 펼쳐졌다.
비에 젖은 올리브밭과 오렌지밭, 안갯속 평야와 산 능선이 겹겹이 이어지며, 도시 밖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풍경 앞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오늘 하루 지나온 길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
론다 아랍 목욕탕|바뇨스 아라베스(Baños Árabes)

성벽 아래 길을 따라 내려가자 중세 아랍 목욕탕, 바뇨스 아라베스(Baños Árabes)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서자 높은 돔 천장 아래 여러 개의 목욕 공간이 층층이 이어져 있었다.
천장에는 별 모양의 작은 구멍들이 촘촘히 뚫려 있었고, 그 틈 사이로 빛과 공기가 은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 바뇨스 아라베스 역사
- 13~14세기 무어 시대 건축
- 스페인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아랍 목욕탕 중 하나
- 당시 하마맘(Hammam) 문화 중심지
이곳은 단순히 몸을 씻는 공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건강을 돌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했다. 때로는 비밀스러운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수백 년 전 사람들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공간이었다.
바뇨스 아라베스의 검은 고양이

목욕탕을 나서던 순간, 출입문 옆에 앉아 있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문틈 사이로 떨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고양이는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돌바닥에 비친 그림자가 흔들렸고, 그 눈빛은 묘하게 깊고 차가웠다.
마치 이 도시를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에게만 허락되는 침묵의 인사처럼 느껴졌다.
비에호 다리(Puente Viejo)의 잔잔한 풍경



조금 더 걷자 비에호 다리(Puente Viejo)가 모습을 드러냈다.
몇 시간 전 누에보 다리(Puente Nuevo)에서 느꼈던 압도적인 웅장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낮고 소박한 돌다리 위를 걷자, 마음도 자연스럽게 느긋해졌다.
강물과 골목 사이로 자리한 작은 집들은 마치 오래된 그림처럼 조용히 풍경 속에 녹아 있었다.
론다 비에호 다리의 역사
비에호 다리는 16세기 후반에 지어진 르네상스 시대의 돌다리다.
누에보 다리가 도시의 웅장함을 상징한다면, 비에호 다리는 론다 사람들의 삶과 생업을 이어주던 현실적인 연결 통로였다.
과거 이 주변에는:
- 가죽 공방
- 직물 작업장
- 토기 제작소
같은 장인들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며, 이 작은 다리는 도시를 연결하는 혈관 같은 역할을 해왔다.
론다 로컬 맛집인 줄 알았는데…

신시가지로 올라서자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우리는 “진짜 로컬 식당”을 찾아 골목골목을 헤매기 시작했다.
몇 블록을 돌다가 작은 식당 하나를 발견하고 들어갔는데, 메뉴판은 온통 스페인어였다.
“드디어 제대로 된 로컬 맛집을 찾았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다가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이요.”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한국어 메뉴판 등장.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관광객들에게 이미 유명한 식당이었던 것이다.
론다 식당에서 생긴 뜻밖의 해프닝

“만국기가 걸려 있었는데 왜 태극기를 못 봤을까…”
서로 웃으며 중얼거렸지만, 이미 배고픔은 판단력을 잃게 만든 뒤였다.
게다가 사장님은 한국인 손님이라며 특별 안주를 서비스로 내주었고, TV 화면에 우리 사진까지 띄워주는 깜짝 이벤트를 준비해 주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여행은 결국 이런 작은 우연과 해프닝들이 쌓여 오래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론다 투우장(Plaza de Toros de Ronda)



늦은 오후, 우리는 론다 투우장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또다시 운영 시간이 끝난 뒤였다.
투우장은 끝내 우리와 인연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론다 투우장은 스페인 투우 문화의 상징적인 장소다.
✔︎ 론다 투우장 역사
- 18세기 후반 완공
-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중 하나
- 로메로(Romero) 가문 활동지
- 현대 스페인식 투우의 발상지
특히 페드로 로메로(Pedro Romero)는 말을 타지 않고 맨몸으로 황소와 맞서는 현대식 투우 방식을 정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맑게 갠 마지막 날의 론다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론다에는 맑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에 이른 아침부터 호텔을 나섰다.
밤새 비를 머금은 나무와 풀잎은 촉촉하게 빛났고, 구시가지의 하얀 건물들은 햇살 아래 더욱 선명하게 반짝였다.
협곡 너머 올리브밭과 구릉도 부드러운 빛 속에서 고요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론다는 사람 마음을 흔드는 도시


호텔로 돌아오는 길, 성당 앞에는 이미 새로운 여행자들이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가 떠나면 또 다른 사람들이 이 도시를 걷고, 웃고, 사진을 남기며 자신만의 론다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웃음이 났다.
“왜 꼭 우리가 떠나는 날만 이렇게 맑은 걸까?”
론다는 이상하게 사람 마음을 조금씩 흔드는 도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다음 도시, 세비야로 향했다.
이번에는 제발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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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안달루시아 여행 5, 론다 RONDA
- 론다 RONDA 둘째 날의 더 긴 이야기는 아래 '스페인 안달루시아 여행 메거진'에 있습니다. http://brunch.co.kr/magazine/junh 스페인 안달루시아 여행 매거진#스페인 #안달루시아 #알함브라brunch.co.kr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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