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채운 음악, 세비야의 오후

궁전 관람을 마치고 성문을 나서자 오후의 햇살이 세비야 대성당 광장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웅장한 고딕 양식의 벽과 첨탑은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히랄다 탑의 긴 그림자는 광장을 가로질러 조용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광장 한쪽에서는 마차꾼이 관광객들과 흥정을 나누고 있었고, 그 사이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섞여 흘러갔다.
우리는 잠시 무염시태 기념비 계단에 앉아 오전 내내 걸어 다닌 다리를 쉬게 했다.
비둘기들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먹이를 찾고 있었고, 오렌지나무에는 주황빛 열매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과 도시, 자연이 한 장면 안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풍경이었다.
한동안 광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서서히 허기가 밀려왔다.


광장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타파스 몇 접시와 차가운 와인을 곁들이며 오전의 여운을 천천히 정리했다.
접시가 하나둘 비워질 무렵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광장의 활기를 뒤로하고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또 달라졌다.
빛바랜 벽과 오래된 문틀, 작은 상점들이 이어졌고, 길가에 무심히 세워진 낡은 자전거와 말라버린 꽃 한 다발마저도 자연스럽게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세비야의 골목은 특별한 무언가가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작은 광장을 지나 옆 골목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남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불렀다.
여성 의류 매장 앞이었다.
순간 나는 그가 옷을 권하려는 줄 알고 손사래부터 쳤다.
"아니야, 아니야. 여기서는 아니야."
내 반응에 웃음을 터뜨린 그는 어닝에 적힌 가게 이름을 가리켰다.
Flor de Lis.
그 순간 그의 최애곡 중 하나인 브라질 보사노바 Flor de Lis가 떠올랐다.
익숙한 노래 제목을 세비야의 골목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잠시 가게 앞에 서서 이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를 우연히 만난 사람처럼.
여행은 때때로 이런 사소한 우연들로 오래 기억된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모퉁이를 돌아가자 검은 망토와 리본 장식을 두른 남성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타와 만돌린 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사람들은 하나둘 걸음을 멈춰 박수를 치며 리듬을 즐기고 있었다.
좁은 골목은 어느새 작은 공연장이 되어 있었다.
특히 그들 곁에서 박수를 치며 몸을 흔들던 어린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듯한 아이는 음악에 맞춰 발을 동동 구르며 연신 손뼉을 치고 있었다.
아이의 순수한 즐거움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우리 역시 어느새 웃으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투나(Tuna)라 불리는 전통 음악 단체였다.
중세 대학생들의 음악 문화에서 시작된 이들은 지금도 축제와 거리에서 노래하며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한다.
그 사실을 몰랐던 그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그들의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세비야에서는 음악이 특별한 공연장이 아니라 거리와 광장,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투나들의 공연이 끝난 뒤 우리는 다시 골목길을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플라멩코 댄스 센터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문 앞까지 다가갔지만 아쉽게도 그날은 이미 운영을 마친 뒤였다. 다음 날 단기 수업 참여를 문의했지만 우리의 출발 일정과 맞지 않아 결국 배워 보지는 못했다.
문틈 사이로 보였던 연습실 풍경만이 작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세비야에 다시 오게 된다면 꼭 해 보고 싶은 일 하나가 그렇게 생겼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작은 디저트 가게에 들렀다.
진열장에는 다양한 디저트가 놓여 있었지만, 유독 오렌지 타르트가 눈길을 끌었다.
한 입 베어 물자 상큼한 오렌지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안달루시아 곳곳에서 보았던 오렌지나무들이 그대로 디저트가 되어 돌아온 듯한 맛이었다.
우리는 타르트를 손에 들고 천천히 골목을 걸었다.

밤이 찾아오자 세비야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졌다.
가로등 불빛은 돌바닥 위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낮 동안 북적이던 거리에는 한결 여유로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숙소 근처 골목에서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기타를 연주하던 노인의 선율이 밤공기 속으로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문득 하루 동안 만났던 음악들이 떠올랐다.
남편이 좋아하던 Flor de Lis.
골목을 가득 채우던 투나들의 노래.
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기타 소리.
그리고 밤이 되어 다시 들려오는 노인의 연주까지.
서로 다른 음악들은 어느새 하나의 리듬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날의 세비야는 풍경보다 소리로 기억된다.
대성당의 종소리, 골목의 노랫소리, 기타 선율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하루 종일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여행이란 어쩌면 이런 순간인지도 모른다.
특별한 명소보다 우연히 마주친 소리와 풍경, 그리고 그날의 감정들이 겹쳐져 오래 남는 것.
세비야의 오후는 그렇게 하나의 음악처럼 흘러갔고, 우리는 그 리듬 속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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