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코츠월드 여행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도시는 글로스터(Gloucester)였다.

코츠월드의 아기자기한 마을들과는 분위기가 꽤 다르다. 로마 시대부터 이어진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고, 그 중심에는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글로스터 대성당이 있다.

글로스터 대성당의 역사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679년경 수도원으로 시작한 이곳은 1080년대 화재로 소실된 뒤 1089년 다시 지어졌고, 1222년에도 큰 화재를 겪었다. 이후 14세기까지 증축이 이어지면서 지금의 수직 고딕 양식이 자리 잡았다.

16세기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수도원이 해체된 뒤에는 영국 성공회 대성당으로 바뀌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도 여러 차례 복원 작업이 이어졌다.

오랜 세월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건물의 모습도 조금씩 달라졌다. 노르만과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이 한 건물 안에 함께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최근에는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호그와트 회랑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었다.

1300년의 시간을 품은 대성당을 한 바퀴 걷다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용히 고인을 배웅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우리는 먼저 성당 바깥을 둘러보기로 했다.

정문을 지나 본당 오른쪽 길을 따라 대성당을 한 바퀴 돌아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실제로 걸어보니 규모가 상당했다. 대성당을 한 바퀴 도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려 작은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1300년이 넘는 동안 증축과 복원을 거쳤지만 서로 다른 시대의 건축이 한데 섞여 있다는 느낌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하나의 건물로 계획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걷다 보니 오래된 마을로 이어지는 통로가 나왔다. 고대 세인트 마이클스 게이트 옆에는 Miller's Green​이라는 오래된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 수도원을 찾은 순례자와 방문객들이 머물던 게스트하우스였다고 한다.

이 길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것을 생각하며 잠시 걸음을 늦췄다.

대성당의 뒷모습은 정면과는 또 달랐다.

여러 시대에 걸쳐 덧붙여진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한눈에 역사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대성당에는 여러 방향으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이 나 있다.

문과 창 주변의 조각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당시 장인들의 솜씨가 보인다. 수백 년 전에 누군가가 이 돌을 직접 깎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경내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많았지만 내 시선은 뜻밖에도 꽃에 오래 머물렀다.

천년 된 돌담 아래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이 낯선 공간을 조금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다

벽을 따라 이어진 조각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돌을 다듬었던 석공들은 자신이 만든 것을 오늘날 사람들이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평생을 바쳐 작업했을 사람들의 이름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대신 그들이 남긴 조각은 지금도 성당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기부금을 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천장과 거대한 기둥, 섬세하게 조각된 석조 장식이 한눈에 들어왔다.

본당 중앙에는 거대한 오르간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뒤로 성가대 공간과 제대가 이어졌다. 예배 공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이곳에서 수많은 예배가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니 단순히 오래된 건물을 보고 있다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아버지의 기도

사람들 사이에서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찾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를 발견했다.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하고 계셨다.

낯선 나라의 낯선 성당에서 무슨 기도를 하고 계신지는 알 수 없었다.

가족을 위한 기도였을까.

건강을 위한 기도였을까.

아니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드리는 감사였을까.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드리는 기도가 잘 닿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시간을 품은 공간

본당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모습이 달라졌다.

기둥 사이로 이어지는 아치와 높은 천장,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걸음이 느려졌다.

성당 동쪽의 Quire에는 1350년에 완성된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창문이었다고 한다.

수백 년 전의 기술로 이 정도 규모의 창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합창대와 본당을 구분하는 루드스크린 가까이 다가가자 조각이 더 자세히 보였다.

멀리서 하나의 장식처럼 보였던 것들이 가까이에서는 각각 다른 무늬와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가까이에서 볼 때 훨씬 잘 느껴진다.

 

 

 

 

 

 

세계 최초의 팬 볼트를 만나다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은 회랑이었다.

1351년부터 1377년 사이에 만들어진 이 회랑은 세계 최초이자 최고의 팬 볼트(Fan Vault) 천장으로 평가받는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부채를 펼친 것 같은 곡선이 끝없이 이어졌다.

돌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선이 섬세했다.

영국 건축가 니콜라우스 페브스너도 자신의 『Buildings of England』에서 이곳을 영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 가운데 하나로 평가했다고 한다.

직접 와보니 그 표현이 이해됐다.

이 회랑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호그와트의 복도로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장면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영화 촬영지라는 사실을 빼고 보더라도 회랑 자체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긴 회랑을 따라 걷다가 잠시 바깥으로 나갔다.

회랑 안쪽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정원은 아니었다. 오히려 단정하고 소박해서 이곳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한쪽에서는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건물이 지금도 계속 손질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완성된 건축물이 아니라 지금도 관리되고 있는 건물이라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다음 이야기

대성당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여러 시대의 흔적이 한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수도원에서 시작해 대성당이 되었고, 화재와 종교개혁, 여러 차례의 복원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건물의 모습도 조금씩 달라졌다.

그런데 성당 밖으로 나오자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성당 앞 광장에는 로컬 장터가 열려 있었고, 골목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오래된 회랑을 걷고 있었는데 몇 걸음 밖으로 나오니 지금의 글로스터가 펼쳐졌다.

오래된 성당과 활기찬 시장이 한 도시에 함께 있다는 것이 글로스터의 또 다른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가 보려 한다.


런던에서 글로스터 가는 방법

 

글로스터는 런던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에도 부담이 크지 않은 도시다. 코츠월드 여행을 시작하거나 중간에 들르는 여행지로도 괜찮다.

기차 이용 — 추천

  • 출발: 런던 패딩턴역(London Paddington)
  • 도착: 글로스터역(Gloucester)
  • 소요시간: 약 1시간 50분~2시간
  • 운행: 직행 또는 첼튼엄 스파(Cheltenham Spa) 경유
  • 영국 기차는 출발일이 가까워지면 요금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아 미리 예매하는 편이 좋다.

버스 이용

  • 출발: 런던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
  • 도착: 글로스터 버스 스테이션
  • 소요시간: 약 3~4시간
  • 기차보다 오래 걸리지만 요금이 저렴한 편이다.

 렌터카 이용

  • 런던 → 글로스터
  • 거리: 약 170km
  • 소요시간: 약 2시간 30분~3시간(교통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코츠월드의 여러 마을을 함께 둘러볼 계획이라면 렌터카가 편하다. 다만 영국은 좌측통행이므로 운전에 익숙하지 않다면 기차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행 팁

글로스터 대성당은 글로스터역에서 걸어서 약 10~15분 거리다.

역에서 구시가지까지 천천히 걸어가면서 오래된 골목과 상점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대성당만 보고 돌아가기보다는 주변을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한 편의 여행기를 쓰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사진을 고르고, 기억을 되짚고, 글을 다듬으며 다시 한 번 여행을 합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구독과 공감, 댓글로 함께해 주세요.
그 작은 응원이 다음 여행기를 쓰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https://kjhee01.tistory.com/98

 

코츠월드 가족여행 1 | 여행을 시작하며, 글로스터에서 첫발을 내딛다

https://brunch.co.kr/@kjhee/132 이번 여행기는 영국 코츠월드를 여행하며 기록한 이야기다.한국의 무더위를 피해 영국으로 피서를 오신 아버지, 런던에서 휴가를 내고 내려온 딸아이, 시력 문제로 운전

kjhee01.tistory.com

 

반응형

+ Recent posts